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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는 기세다

틀릴까 봐 못 하는 우리, 틀려도 말하는 그들

by 마담 히유

토익 800점.


토익학원에 스터디에, 토익공부에 열정적인 한국사람들이 보자면 "그쯤이야" 하는 점수일 수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토익이 취직하는 데 있어서 필수가 아니기 때문에 아예 시험을 보지 않는 경우도 많으나, 안타깝게도 내가 나온 학교에서는 졸업 조건이었다.


한국에서 토익공부를 했던 나는 900점을 넘었고, 한 친구가 말했다.

"와 900점?! 너 바이링구얼이네!?!?"
"...? 전혀 아닌데?"
"900점이면 바이링구얼이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토익은 영어시험 중에서 "쉬운 시험"에 속한다.

실제로 영어로 한마디 뻥긋하지 못해도 900점을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또한 그랬다.

그저 한국식 영어교육의 산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고 "영어 바이링구얼"이라고 칭했다.


프랑스에서 말하는 "바이링구얼" 기준이 낮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한참 뒤다.





프랑스인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당당하게 본인이 바이링구얼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Moi je suis bilingue… je parle anglais aussi.”

(나 바이링구얼이야. 영어도 하지.)


이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와 멋지다”라고 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얼마나 영어를 잘하길래 자기 입으로 바이링구얼이라고 하는 걸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5초 뒤면 그 사람이 말하는 영어의 수준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한다.

내가 아는 바이링구얼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발음은 물론이고, 문법조차 원어민이 아닌 게 너무 티가 난다.


영어를 못하는 것 자체는 죄도 아니고 내가 그것을 판단할 수준도 되지 않는다.

다만 본인들을 직접 "바이링구얼"이라고 칭하는 그들의 자신감에, 그 기세에 진심으로 감탄하게 될 뿐이다.


물론 그중에는 "진짜" 바이링구얼도 존재한다.

최근에 만난 프랑스 영국 혼혈인 회사 인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인턴은 진짜 바이링구얼이다)

"다들 본인들이 바이링구얼이라고 하는데, 진짜 바이링구얼은 그렇게 많지 않아"


드디어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났구나...!




사실 프랑스의 바이링구얼에 대한 기준이 낮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에서 석사 과정을 하며 동시에 회사를 다니는 제도(Alternance)로 2년을 보냈는데, 이 과정의 가장 첫 관문은 내 학비를 대줄 회사를 찾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은 외국인인 데다가, 단 한 번도 회사에서 일해보지 않은 햇병아리가, 외국에서 첫 직장을 구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외국인이다.

물론 이제는 프랑스에서 지낸 지 꽤 된지라 책도 읽고 뉴스도 보고 꿈조차 프랑스어로 꾸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언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기에 이력서에 내 불어실력을 "고급"이라고 적었다.


그렇게 구직활동을 하던 중, 한 회사에서 면접을 볼 일이 있었고, 그는 면접이 다 마무리될 즈음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면접을 떠나서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왜 불어 레벨을 고급이라고 적었어? 바이링구얼이라고 적는 게 니 이력서에 더 나을 거야. 그렇게 적어도 돼."

오해하지 말라, 자랑이 아니다. 이는 내 불어가 프랑스인 수준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회사에서 떨어진 이유가 내 불어 때문이었으니까.


다만, 내 불어가 그들이 말하는 "바이링구얼"수준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에서 말하는 바이링구얼은, 언어를 "완벽하게"구사함이 아니었다.




한국사람들은 영어를 정말 웬만큼 하지 않는 한 "나 영어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나, 프랑스는 그렇지 않다. 영어로 자기 의사 표현을 하면 영어를 하는 것이고, 문법이 다 틀려도 주저하지 않고 영어를 한다. 자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는 외국어를, 특히 영어를 너무 ‘정확히’ 하려고 한다.

문법이 틀리면 창피하고, 단어가 생각 안 나면 얼어붙는다. 완벽을 추구하고, 그 사이에서 결국 입을 다문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다르다.
단어 하나를 알아도, 그걸로 문장을 만든다. 문법이 엉망이어도 당당하고, 발음이 살짝 "후렌치"해도 기죽지 않는다. 언어는 도구일 뿐이고, 난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 도구가 최첨단이든, 오래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도구의 역할"인,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이다.



나는 생각한다. 외국어는 기세다.


이제는 나도 그들의 기세를 조금씩 배우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말 안 했을 표현도 꺼내 보게 되고, 틀릴까 봐 쭈뼛거리던 순간에 그냥 한 번 질러보기도 한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다시 말한다. 나는 외국인이고 당신의 언어를 해주는 호의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니 내가 쪼들릴 이유는 전혀 없다.


언어는 결국, 틀려도 상관없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일 뿐이니까.


외국어는 기세다.

프랑스인에게 배운, 작지만 강력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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