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들은 나이 들수록 더 바빠진다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 마트 계산대에서 만난 백발의 할머니가 기억난다.
하이힐을 신고, 몸매선이 은근하게 드러나지만 또 너무 투머치 하지는 않는 단아한 원피스, 입술에는 진한 빨간색 립스틱, 팔에는 약간의 문신.
그분이 한 손으로 와인을 계산대에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우... 저 나이에?"
지금 돌아서 생각해 보면 참 한국물이 덜 빠진 생각이었다.
한국에서라면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그만두는 것들"이 생긴다.
일도, 연애도, 여행도, 예뻐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도.
어느 순간부터 "나이에 맞게"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하면 내 생각도 슬슬 그렇게 물들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살다 보면, 그런 나이의 기준이 조금씩 무너지는 걸 느낀다.
여기서는 60대에도 일하고, 연애하고, 외모에 신경 쓰고, 혼자 여행도 잘 다닌다.
그 어느 것도 "주책"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는 나이가 들어도 인생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이 더 열심히 살아간다.
2014년, 유학 첫해. 첫해였던 만큼 특별했던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잊히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같은 수업을 듣던, 한 할아버지.
백발에 쪼글쪼글한 피부. 한눈에 봐도 80은 훌쩍 넘으신 듯한 인상이었지만, (물론 백인들이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인다는 걸 감안하면 70 되었을까, 하지만 내 주변 70 가까운 나이 된 백인들 중 그 누구도 그런 분위기를 풍기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분이 여든 즈음이라고 믿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어가 모국어가 아니셨다. 내 기억으론 스웨덴 분.
그런 분이, 나랑 같이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 수업을 듣고 계셨다
아주 오래전, "라때" 시절에 그런 광고 하나가 있었다.
대학 개강 첫날,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이 교수님을 기다리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데 한 나이 든 분이 강의실로 들어오신다. 실내는 금세 조용해지고, 다들 숨죽이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하지만 그분은 강단이 아닌 학생들 사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셨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닫는다. 교수님이 아니라, 동기였구나.
딱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그 소르본 강의실에서 만났던 그 할아버지는.
아직도 기억나는 한 일화는, 내가 시험을 너무 망쳐서 20점 만점에 9점을 받고 통과를 하지 못해 살짝 멘붕 상태로, 반쯤 울상으로 앉아 있었는데 옆에 앉은 그 할아버지가 시험지를 떨리는 손으로 받으시며 성적을 확인하시더니 조심스레 접어 가방에 넣고 계셨다.
나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슬쩍 그분의 점수를 확인했다.
6점
...뭔가 동지애가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취미로 수업 듣는 외국인 노인에게도 인정머리 없는 프랑스다.
공부뿐만이 아니다. 인간관계도 똑같다.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가 좁아진다고들 말한다. 친구도, 새로운 만남도, 심지어 연애도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고.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관계를 맺는 시점을 나이로 한정 짓지 않는다.
단순 인간관계가 아닌 사랑도 말이다.
가족과 함께 베니스로 여행을 갔던 어느 여름이었다. 동양계 프랑스인 남편, 그리고 그냥 한국인인 나.
외관상으로만 보면 우리가 프랑스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덕분에(?)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가 프랑스어를 하는 것을 목격하면 바로 우리에게 스몰톡을 건네곤 한다. “어, 프랑스인이셨어요?”
그날도 비슷했다. 베니스 공항에서 수상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버스 안엔 우리 외에도 몇몇 관광객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나이 지긋한 프랑스인 커플이 있었다. 옆에서 남편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신경을 끄고 멍하니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베니스 시내 여행을 하는데 남편이 그 둘을 알아보며 말하는 게 아닌가.
"어, 어제 본 '젊은 커플 jeune couple' 이네"
난 젊은 커플을 본 기억이 없었기에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고, 고개를 들은 나는 어제 본 그 나이 든 커플이 보일 뿐이었다.
남편은 설명했다.
"아니, 나이가 젊다는 게 아니라, 얘기 들어보니 둘이 만난 지 얼마 안 됐대."
실제로 한국에서 "젊은 커플"이라 하면 당연히 외모의 나이를 의미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젊은 커플 jeune couple은 다르다.
물론 한국처럼 젊은 사람들이 커플인 경우를 이야기할 수 도있지만,
"새롭게 시작한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게 20대든, 60대든, 혹은 80대든 상관없이.
이곳에서 나이는 상관이 없다.
프랑스에서는 "나이에 맞게"라는 개념이 별로 없다.
그만큼 시작도 늦어도 괜찮다.
태권도 하얀 띠를 맨 꼬맹이들 사이에서 내가 껴있어도 괜찮다. (아니, 그 이전에 성인반이 무조건 있다.)
나도 첫 아이를 낳고서야, 항상 보는 것만 좋아하던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촌형은 40이 넘은 나이에 유도를 처음 시작했고, 50이 된 지금 검은띠의 수준급 유단자다.
전 직장동료는 63년생 아주머니였는데, 사귄 지 1년 정도 된 남자친구와 은퇴 후 살 집으로 바닷가 별장을 샀고, 요트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다른 50대 동료는 발레 수업을 등록했다. 원래 발레를 하시던 분도 아니다. 그냥 갑자기 배워보고 싶으셨다고 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스몰톡 중 내가 말했다.
"나도 오토바이 타고 싶었는데! 하지만 난 지금 너무 늙었어."
한 동료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대답했다
"바이크랑 나이는 상관없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우리는 혹시, 너무 빨리 포기하고 있던 건 아닐까?
(물론 이제는 겁이 많아져서 탈 수 없을 듯하다.)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나이’는 인생의 속도를 늦추는 이유가 아니라, 새로운 속도를 설정하는 계기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았으니까, 다음 챕터는 다르게 살아볼까?" 그런 식이다.
그렇다고 프랑스 사람들이 매일을 뜨겁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유쾌하게,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간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는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이 마인드를 알려주고 싶다.
"엄마, 나 이런 걸 시작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같은 말을 하지 않고
"이번엔 뭘 해볼까?"를 말하게 하고 싶다.
프랑스인의 기본 마인드는 결국 이거다.
인생을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
누군가는 끝이라 여기는 순간을, 이들은 다음 챕터의 시작으로 여긴다.
나도 지금 그 챕터를 넘길 준비가 되었는지, 다시 한번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