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0대 중반의 나이로 대구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대구 산*초등학교. 대학 시절부터 불화했던 교직에 실제로 발을 들여놓는 첫 번째 장소였다. 발령을 받으며 한 다짐은 두 가지였다. 아이들을 사랑하겠다. 행복한 선생님을 찾겠다.
아이들을 사랑할 자신은 있었는데 행복한 선생님이 될 자신이 없었다. 난 불행한 교대생이었는데 현장에서는 행복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행복한 선생님이 존재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대구에서 이 글의 주인공이 되는 선배 박** 선생님을 만났다. 선배의 교실을 지나는데 아이들이 원을 만들어 앉아 있고 선배의 기타 연주에 맞추어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선배는 노래를 부르며 웃고 있었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이다. 선배는 행복해 보였다. 저 사람이다 싶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멋진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저 나이 때 뭐했지?’ 하고 한숨을 쉬곤 하는데 나는 과거에 만 났던 선배의 나이가 되고 나서야 ‘선배는 이 나이 때 벌써 그걸 했었구나’ 하며 놀라곤 한다. 대구에서의 교직 생활 동안 선배는 30대 중반이었다. 그때 선배는 이미 탁구를 잘 쳤고 배드민턴 고수였으며 ‘대나무 따라잡기 프로젝트’라는 주제로 인성 교육 연구 대회에 출전했다. 부장 역할을 열정적으로 맡으며 학교에서도 목소리를 냈다. 그야말로 뭐든 능숙한 ‘부장님’ 이미지 그 자체였다.
신규 교사였던 나는 그런 팔방미인 선배 곁에 머무는 특권을 얻어 즐겁게 배드민턴을 배웠고, 발명 교육은 이렇 게 할 수 있다며 눈을 빛내며 알려주는 선배의 가르침을 받았다. 방과후 탁구 교실, 배드민턴 교실을 열어 직접 룰루랄라 지도하는 열성적인 교사의 모습을 지켜봤다.
산*초에서의 둘째 해, 선배는 교내에 밴드를 만들겠다고 했다. 드럼, 피아노, 베이스 기타 등에 재능 있는 선 생님 4명과 그런 재능이 없는 내가 모였다. 밴드부 아이들도 모집됐다. 선배는 내게 매니저 및 보컬 지도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노래는 고음 불가에 동작도 잘 못 외우는 내가 보컬 담당이라니…. 그해 세상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내가 뽑혔을 것이다.
“송이 쌤은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선배의 말이 나를 춤추게 했다. 선배는 내게 음악적 기대를 안고서가 아니라 함께 하면 더 즐겁고 좋을 것 같 아 밴드부를 같이 하자고 했던 점을 나도 알고 있었다. 선배의 예상은 적중했다. 곧 악동뮤지션의 노래 200%’ 가 연습곡으로 선정되었고 나는 친구의 도움을 빌려 안무를 열심히 짜 보컬들을 가르쳤다. 노래에 대해서는 무얼 가르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부분을 좀 더 살리면 좋겠다는 정도로 지도했던 것 같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점은 그해 나는 행복했다는 것이다. 내 눈앞에는 즐겁게 연주 연습을 하는 선배, 후배가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활기차게 가르쳤다. 연습 후 학교 근처 카페에서 함께한 시간도 항상 빠르게 지났다. 가정을 이룬 선배들이 나눠주는 생활인으로서의 이야기는 또 어찌나 재밌던지. 그 시절 장면 속 우리들은 훨씬 젊었고 모두 웃고 있었다. 나는 대구에 발령이 난 해에 다시 친 서울 임용고시에 합격해 내년이면 서울로 간다는 희망에도 부풀어 있었다. 서울에 올라가 겪을 고난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약간의 힌트도 얻지 못한 채 마냥 즐거워했다.
서울에 와서도 선배와 연락이 이어졌다. 선배는 계속하여 ‘대나무 따라잡기 프로젝트’ 인성 교육을 했고 수업 연 구에 매진하여 수업 연구 대회에서 1등급을 받고 연구 교사가 됐다. 교육과정 연구 책도 냈다. 책 속에 나와 있는 저자 소개처럼 ‘대구 소재 초등학교에서 19여 년간 아이들과 행복한 동행을 이어오고’ 있으며 ‘도덕 시간 이면 눈빛이 흐려지고 따분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학생과 교사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도덕 수업이 무얼까 고민 하다 수업 연구를 시작하고’ 지금도 국정 교과서 개정에 참여하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선배는 결국 그 모든 노력을 통해 대나무같이 뿌리가 튼튼하고 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다. 최근 그를 떠올린 문장들 이 있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 김장하
“서로 밀고 밀치며 욕망의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일부 교사, 양육자, 학생들이 언론을 장식하고 도드라져 보이는 세상.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졸음을 물리치고 눈물을 훔쳐 가며 때로 한 권의 책에 의지해 말문을 틔우 고 고민을 나누며, 그러니까 제 가진 생명력을 총동원하여 매일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으로, 답 없는 공교육의 뿌리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 「해방의 밤」, 은유
‘지탱’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선배는 내게 평범한 사람이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비범하고 잘 보이는 존 재지만 ‘지탱’이라는 단어가 선배를 떠올리게 했다. 선배는 자신의 역할을 이왕이면 즐겁게, 열정적으로 해냈고 그 힘으로 아이들을 지탱했고 이 사회를 지탱하는 존재가 됐다. 답 없는 공교육의 뿌리를 지탱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에게 얼마 전 고민 상담을 했다.
“제가 봤을 때 부장님은 ‘행복한 교사’거든요. 교직 생활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한 교사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그게 안 돼요. 직업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마음을 많이 내려놓기는 했지만 행복한 교사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애들이 밉지 않고 올 한 해 그래도 즐겁게 잘 생활하고 있으면 행복한 교사지 뭐. 인사이드 아웃 보면 행복한 것만 다가 아니잖아. 어렵고 힘든 일도 물론 있지. 지금 큰 일처럼 느껴져도 ‘지나 보면 별일 아니다’라는 생각 을 늘 해. 그때는 큰 일이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제자들 만나면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하게 되더라고. 또 가르치 며 힘들어도 지나서 애들이 와서 하는 얘기 들어보면 헛된 1년이 아니었다 싶어.”
“부장님은 의미에서 행복이 오는군요?”
“응. 의미에서 오지. 행복이라는 것도 그래. 죽음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보면 당장 내일 죽었을 때 아쉬운 점이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 이왕 오늘 살 거면 최선을 다해 사는 거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내 삶 자체 가 의미 있다고 생각되고, 세상이 말하는 명예라든지 부, 권력을 갖지 못해도 남들로부터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도 아쉽지가 않은 거지. 물론 100점으로 다 해낼 수는 없지. 애들한테도 다 해 줄 수는 없어. 근데 마음은 전할 수 있는 거지. 다 전달되지는 않겠지만 학업 성취도가 낮은 아이에게는 학업적으로 도와주고, 마음 이 아픈 아이들에게는 마음을 배려하면서 손도 잡아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장난꾸러기는 또 그에 맞게 돌봐주는 거지. 그런 거 자체가 다 의미 있는 거지. 너무 100점짜리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남이 만든 기준에 100점을 맞추지 말고 내가 못하는 것은 인정하고 지닌 능력이 60이라면 60만큼 하면 100점인 거잖아. 근데 우리도 의미 있게 살고 있잖아?”
“네, 의미는 많아요. 그런데 저는 의미가 행복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기준에 딱 맞기 때문에 ‘나는 행복한 선생님이다’가 아니라 그냥 마냥 행복해도 돼. ‘나는 행복한 선생님이야!’라고 그냥 말하는 거야. 그러면 작은 일도 행복한 거지. ‘애들이 와서 편지도 주고 나는 행복한 선 생님이야.’, ‘이렇게 애들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행복한 선생님이야.’ 맞잖아? 행복하다고 내가 얘기하 면 되는 거잖아. 그거를 자꾸 의미에 맞추려고 하다 보면 힘들어. 앞에서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난 원래 그 냥 행복한 사람이야. 나이가 들수록 점점 채우고 싶은 욕구들이 생겨서 책을 읽으면서 ‘행복이 이럴 수도 있겠 다’ 규정하고 철학적 의미를 만들게 되는데 나는 책을 읽기 전에도 행복했어. 산*초에 있을 때는 책도 별로 안 봤어. 그냥 교직 생활 자체가 즐거웠던 거야”
“너무 와 닿는 게 저는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도서관 가서 책을 읽으면서 ‘이런 삶이 좋은 거구나’라고 습 득하고 문장으로 규정하고 글로 쓰면서 개념화하는 데 익숙해요. 그래서 ‘나는 행복한 교사다’라고 규정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저는 비워내야 할 것 같아요”
“그냥 오늘 하루 있었던 경험 하나를 떠올려 보는 거지. ‘오늘 선배하고 통화해서 기분이 좋았다’, ‘편지도 받고 좋았다’ 그냥 그렇게. 너무 규정하려 하지 말고. 정답이 어디 있겠나.”
지난 10년, 선배는 대나무처럼 성장했다. 그 과정을 볼 수 있어 기뻤고 영광이었다. 나는 ‘완벽하고 행복한 교 사’로 보이는 선배라는 대나무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아이들을 향해 웃듯이 나도 아이들을 향해 웃는다. 선배도 나를 보며 또 하나의 대나무로 성장해 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나의 마디를 만드느라 꼭 겪어야 하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서 또다시 저 너그러운 하늘을 향해 팔 벌려 자라나는 대나무로 성장하기 를 바랐을 것이다. 자기다운 대나무로 자라나고 있는 선배 덕분에 나도 ‘나다운 대나무 따라잡기 프로젝트’를 계속할 용기를 얻는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후배에게 사표가 되고 있는 선배라는 대나무와 나란히 성장하며 숲 을 이루어 가고 싶다.
10년 전, 선배는 서울로 떠나는 내게 이근후의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라는 책을 선물했다. 표 지를 넘기니 메모가 하나 있었다.
*송이 선생님! 더할 나위 없었다. – yes 서울에서도 늘 웃는 일이 가득하시길~
10년이 지난 지금, 선배에게 말하고 싶다.
“교사가 된 제게 또 다른 스승이 되어 주신 박** 부장님! 부장님과 함께한 2년은 제게도 더할 나위 없었습니 다. 그리고 지금도 더할 나위 없습니다.”
다가오는 스승의 날, 이 글로 감사 인사를 대신해야겠다.
2025.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