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우체통 앞에서/신현정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냉큼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데기를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우체국이 있다. 택배를 부치러 가는 길에 평소에는 보고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빨간 우체통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를 읽고 나서였는지 모르겠다. 의식하지 않을 때는 보고도 본 것이라 할 수 없나보다. 우체통이 내 눈에 인식된 데에는 이 시의 공이 크다. 요즘에는 빨간 우체통 보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때는 손으로 쓴 편지를 우표를 사서 혀에 침 발라 봉투에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 일이 흔했는데 요즘은 그럴 일이 거의 없다. 이메일도 이젠 옛말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세상은 자꾸 편리해지는데 예전 불편했던 아날로그적 시스템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중학교 시절 미국 친구를 사귄다고 펜팔을 하느라 부산을 떨던 때도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던 일들이 새삼 잊고있던 옛 노래처럼 아득하게 그리워진다. 한 달도 훨씬 넘어서야 답장을 받을 수 있었으니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이다.
사랑을 고백한 편지였을까? 펀지를 부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우체통 만큼이나 빨갛게 달아오른 시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사랑을 고백한 편지였으리라. 어서 부치라고 편지 안에서 알껍데기를 톡톡 두드리는 듯한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백하고자 하는 마음이 차올라온다. 그러나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와 함께 조각조각 찢지 못한 사랑의 마음을 품고 되돌아가는 시인의 발길이 무겁다.
오늘 밤 받을 이 없는 편지라도 한 장 써볼까나? 우표에 침 발라 붙인 편지 봉투를 우체통에 한 번 넣어보고 싶다. 부끄러워 빨갛게 달아오른 우체통처럼 옛기억에 젖어 내 마음도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