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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과 방귀

by 박지영JPY

첫사랑 /장정일

중학교 1학년 2학기

학기말 고사 화학 시험 답안지를 백지 제출하고

담임선생님께 체벌을 받았다

올해 막 K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화학을 가르치게 된 선생님이었다


​시험을 모두 마친 날

담임선생님과 나만 교실에 남았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 줄 몰랐고

선생님은 내가 철없이 저지른 일로

교장실에서 경위서를 썼다


선생님은 내일 어머니를 불러오는 것과

체벌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나는 독립을 하고

새로운 관계를 찾기로 했다

허리를 굽히고서 두 발목을 잡았다


선생님의 매질은 정열적이었다

밀대 자루가 떨어질 때마다

내 하얀 엉덩이는 선생님께

사랑의 편지를 썼다


​어둑어둑한 12월이 살짝 얽은 그녀의 얼굴을 메우기 시작할 때

열등생은 깨닫는다

백지 답안지를 낸 이유를


장정일 시인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처음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거부감, 그러나 곧이어 밀려오는 알싸한 후련함...

오늘 '눈 속의 구조대'를 읽다가 찾아낸 그의 시 '첫사랑'.

과격하고 격렬한, 직선적인 시어를 구사하는 그 답지 않게 평범한 듯 쓰인 '첫사랑'을 읽다가 갑자기 영화 같은 한 장면이 그려진다. 슬며시 미소가 나온다.


내 첫사랑도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갓 부임하신 키 큰 영어 선생님이 어느 날 허락도 없이 마음에 쑥 들어오셨다. 몰래 하는 짝사랑의 달콤함과 절망감에 허덕이던 어느 날의 영어 수업시간. 그날도 수업은 뒷전. 아린 마음으로 안개 같은 환상에 젖어있었다. 선생님이 교과서를 들고 읽으시면서 내쪽으로 걸어오셨다.

'아! 선생님이 내게로 가까이 오신다'

콩당콩당 뛰는 마음을 잡아 쥐고 있던 그 순간.

갑자기 벌어진 대참사!

누군가가 뿜어낸 독가스로 내 주변이 순식간에 초토화된 것이다. 하필 왜 선생님이 이쪽으로 오시는 와중에 독가스를 방출한 걸까. 방귀를 뀌어대고도 앙큼하게 앉아있는 범인이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벌인 짓이 아니건만 왜 내 얼굴이 빨개진 걸까...

'읍' 하면서 뒤로 후퇴하는 선생님의 백지장 같은 얼굴.

그날 죄 없는 내 얼굴은 화염구덩이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빨간 원숭이였다. 그날 맡았던 방귀만큼 지독한 냄새는 이 나이 되어서도 맡아본 적이 없다. 불처럼 달아오른 내 얼굴로 미루어 선생님은 범인이 나라고 생각하셨겠지...

나는 왜 나와 관련 없는 일에 자꾸 얼굴이 빨개지는 건지. 이후로도 나는 괜스레 빨개지는 얼굴로 손해를 많이 보고 살았다. 슬프게도 내 첫사랑의 환상은 누군가의 뻔뻔한 방귀로 인해 갈바를 모르고 한동안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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