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얘기가 어려웠던 시절
대학 시절, 친구가 엄마랑 통화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어쩜 그리 시시콜콜한 얘기들까지 다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랬다.
“너 엄마랑 많이 친하구나?”
친구는 어릴 때부터 엄마랑 허물없이 속 얘기를 했었다고 했고,
나는 그런 사이가 참 생소하고 낯설었다.
엄마와 사이가 나쁜 건 전혀 아니었지만 무언가 내 감정이나 고민을 나누는 것이 어색했었다.
신혼 초, 엄마는 “너는 왜 속얘기를 하지 않니?” 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셨었다.
모든 걸 나누게 된 시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이러한 왠지 모를 어색함은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중간이 없는 스타일인지, 나는 언제부터인가 엄마에게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곧장 모든 걸 엄마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신랑이 지나가는 말로 “뭘 그런 것까지 얘기해? 장모님 피곤하시겠다” 할 정도였다.
내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우리 엄마는 T성향이셔서 내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잘 넘기신다 생각했다.
또한 뭐든 알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 일종의 ‘고지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를 나의 대나무숲인 양 고민들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고민과 함께 나눈 책임감의 무게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엄마가 나의 그 걱정들을 듣고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특히, 엄마가 나이가 들어가실수록 나를 포함한 다른 자식들 걱정이 엄마를 버겁게 하는 게 보였다.
아니, 정확히 언젠가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좀 버겁다고.
엄마는 가끔 농담조로 “내가 우리 집의 액받이야, 그래서 머리숱이 다 빠졌나 봐~”말씀하셨는데
사실 그건 농담이 아니었던 거다.
그리고 그걸 뒤늦게 알게 된 건 사실 눈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내가 살짝 던진 말도 몇 날며칠 곱씹어 해결책을 주시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볍게 고민을 토스하면서, 엄마에게 무거운 책임감도 같이 드렸던 것이다.
거울 치료 비슷한 건지, 동생 걱정으로 힘들어하시는 엄마를 보고 나도 엄마에게 이런 버거움을 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인생은 각자 사는 거야. 엄마가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동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냥 본인의 힘든 것은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해.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거야.”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자의 삶, 그리고 적당히의 미학
엄마는 여전히 자식들, 손주들 걱정이 많다. 다만, 요즘 엄마의 모습을 보면 조금쯤은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요즘은 조금쯤 본인의 삶에 더 집중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예전보다 연락이 더 어렵지만 오히려 좋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가? 나는 여전히 엄마와 이런저런 고민들을 나눈다. 하지만, 이제는 앓는 소리만 하지 않는다. 여전히 고민을 나누지만 고민 끝에는 “별 거 아닐 거야,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말을 덧붙이곤 한다. 뒤에서 마음 쓰실 엄마를 알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을 나누게 되면, 짐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소중한 관계일수록, ‘적당히’의 미학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