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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선택지 : 평화주의, 제국주의, 아시아주의

「삼취인경륜문답」의 현재적 함의

by 삼중전공생 Mar 07. 2025

혼돈의 근대 일본, 어디로 가야 하는가?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문호를 두드릴 때, 일본도 다른 나라들과 엇비슷한 시기에 개항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회이자 위기라고 해야겠습니다. 여하간 페리 제독이 일본에 처음 내항한 것이 1853년이고,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것이 1854년이니, 병인박해를 구실로 벌어진 병인양요가 1866년인 것을 생각하면 조선보다는 개항의 기회가 약간 빨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조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변방의 아시아 국가였던 일본이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23년 만인 1876년에 조선을 압박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만들 능력을 갖춘 것은, 개항의 기회가 일본이 10년 내외로 약간 빨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본의 개화기, 즉 메이지 시대를 일본이 막연히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제국주의의 맹아를 싹 틔운 시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합한 이면을 갖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일본의 무사도로 무장한 사무라이들, 에도 막부 시기 퍼지기 시작한 성리학을 수용한 일파들 그리고 서구에서 막 들어온 온갖 법, 제도, 사상과 각종 실용학문들을 선취한 개화기 지식인들이 서로 뒤얽히며 갖가지 불협화음을 내던 시기였으니 말입니다. 이 복잡한 전후 사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아 보였던 메이지 유신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기막힌 우연과 행운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이 난잡한 근대 일본 속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을 어떻게 고민했을까요. 근대 일본사 연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삼취인경륜문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일본에게 주어진 세 가지 길 : 평화주의, 제국주의, 아시아주의


페리 제독의 내항을 전후한 시절의 일본에 무엇보다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바로 '서양의 압도적인 무력'이었습니다. 지적 문명과 정신은 서양보다 앞선다고 '스스로는' 생각할 여지가 있었지만, 서양의 전함과 대포에는 객관적으로 일본이 한참 뒤처졌기 때문입니다. 그 서구 열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전근대의 나약한 일본을 어떻게 해야 서구 열강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느냐가 당대의 지식인들의 최대 고민거리였습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처음 일본어로 번역한 나카에 조민도 이러한 고민을 깊게 밀고 나갔던 지식인이었습니다.


1887년에 발간된 「삼취인경륜문답」은 「三酔人経綸問答」이라는 말처럼 말 그대로 3명의 취한 사람들이 국가의 경영에 관해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소설입니다. 그렇지만 무슨 감동을 주는 소설은 아니고, 나카에 조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일본이 나아가야 할 길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책이 발간된 당대에는 널리 읽히지 못했지만, 후대에 재발굴되어 근대 일본사의 중요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양학신사, 호걸군, 남해선생이 등장합니다. 양학신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서구 열강들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일본은 이와 달리 철저하게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민주주의'를 통해 지향함으로써 '문명인'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를 부수고 군대를 해체하여 완전한 비폭력주의와 평화를 지향하면, 서구 열강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감히 일본을 수탈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호걸군은 이런 양학신사의 주장을 허황된 소리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미 서구 열강들이 자신의 체급을 불리기 위해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타국들을 침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을 정복해 '소국' 일본에서 탈피하고 '대국'을 지향하여 서구 열강과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양학신사가 다소 급진적인 이상주의자라면, 호걸군은 확실히 현실주의자에 가깝겠습니다.


남해선생은 이 둘의 의견을 종합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소설 말미에 정리하는데, 특이하게도 그는 중국의 막대한 시장을 일본이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호주의' 내지는 '중립주의'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일본에 위기가 닥치면 아시아의 국가들, 특히 중국과 형제국이 되어 도움을 주고받으며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중국이 일본 입장에서 만만하게 볼 나라도 아니거니와, 섣불리 중국을 적대하면 일본에도 이로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남해선생의 독특한 입장을 우리는 아시아주의라는 다소 모호한 이름으로 불러보겠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나카에 조민 내면의 다양한 목소리에 불과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나카에 조민이 영향을 받은 1880년대 당대 일본의 대외정책론을 놓고 둘러싼 정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실제 생각과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들입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거의 140년 후의 미래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결과적으로 어느 길을 걷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대동아공영'이라는 껍데기뿐인 아시아주의의 구호 아래 실제로 걸은 길은 제국주의적 침탈이었으니 말입니다.




양학신사, 호걸군, 남해선생은 21세기 일본에도 살아있다?


공산당과거 사회당 좌파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통적인 '좌파'는 양학신사평화주의를 따르는 축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이들은 일본의 자위대가 '일본군'이 되는 것에 결단코 반대하며 무엇보다 '핵무기'에 관해서 아주 강경한 반대 입장을 가집니다. 어떻게 보면 대책 없는 이상주의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한국 입장에서는 과거사에 대한 입장이 피해자중심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습니다. 그들은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보니 말입니다.


일본회의자민당 극우 같은 존재들은 여전히 호걸군의 입장을 따르는 축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에야 이들이 다시금 아시아 침공 같은 주장을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과거 '일본 제국'이 걸었던 길이 일본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결단이었다거나 최소한 '불가피했다'고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현실주의적으로 보면 부분적으로 이해가 가는 여지도 없진 않지만, 여하간 한국 입장에서는 이들은 '일본 제국의 망령'으로 용서할 수 없는 혐오의 대상이겠습니다.


그럼 남해선생은요? 제가 보기엔 과거 사회당 우파 내지는 2009년 ~ 2011년까지 반짝 집권한 과거 민주당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당시 역임했던 총리 중 한 명인 하토야마 유키오는 일본이 "미국에 NO"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일관계 일변도의 자민당식 외교를 탈피하고, 미국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이후 취임한 간 나오토 총리는 일본 보수층으로부터 '한국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일본 총리 사상 가장 한일관계를 중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 우호주의' 내지는 '중립외교'를 표방한 점은 남해선생의 아이디어와 언뜻 닮았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저는 140년 전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고민한 대외정책 방향은 지금까지도 이런 식으로 일정한 변주를 거치며 유지되고 있다고 봅니다. 일본이 가진 지정학적 중요성이나 경제적 잠재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결론 : 일본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5년 간, 그리고 아베 신조가 1기와 2기를 합쳐 장장 8년 간 일본 총리로 머무르면서 우리에게 남긴 '일본 극우'의 잔상이 너무 짙게 남아있는 나머지 한국 대중들 사이에는 "일본은 원래 다 저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실 할 말은 없습니다. 그들이 패전국 일본을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고, 아직도 한국에 박정희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일본에도 그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버블 경제의 풍요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민주화 운동으로 대안 야당 세력이 성장할 틈이 있었던 반면에, 일본은 특유의 선거 제도와 다른 여러 구조적인 이유로 야당이 성장하지 못하고 붕괴했다는 차이점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이 세 인물들 중에서 주류를 꼽으라고 한다면 '호걸군'이라고 말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야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그래서 과거 반성도 안 하기 때문에 한국은 영원히 일본과 손을 잡을 수 없다'고 말해도, 뭐 좋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 분명히 하자면, 일본은 단일한 하나의 쇠구슬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 다양한 물감이 녹아들어간 요란한 유리구슬에 가깝습니다.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고 양국이 마음의 준비가 되면, 저는 서로가 발전적인 협력 관계를 맺을 가능세계도 충분히 열려있다고 봅니다.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주장이 꼭 '일본 극우'를 일방적으로 용서하고 품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100여 년 전 호걸군이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을지라도 다른 인물들은 또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추신 : 「삼취인경륜문답」을 직접 읽은 분들께


제가 양학신사, 호걸군, 남해선생의 각 입장을 다소 단면적으로 요약한 건 인정해야겠습니다. 양학신사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전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모호하게 남겼고, 호걸군도 중국 침략의 궁극적 목적을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달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요소야 말로 나카에 조민의 내면의 개인적인 목소리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역사적 의의가 적은 부분이라고 보고 과감하게 편집 및 요약에서 배제했습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또 이런 부분을 알려드리는 게 맞기 때문에 말미에나마 첨언을 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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