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편지

2023.04.09

by 채리 김

이치코상에게


사흘을 지독하게 앓고 나니 드디어 이게 사람 사는 삶인가 싶더라. 집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거든. 딸기와 수박, 바나나, 미니 캐럿을 사서 먹었어. 맛있는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고, 직장인인 거 티 내듯 알람 없이도 새벽 7시에 눈을 떴어. 약을 먹고 다시 자. 기침과 콧물을 반복하며 가습기에 물을 채워. 통창이 좋은 이유는 집 안에만 있어도 답답하지 않다는 것. 가장 아팠던 첫날, 그렇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밥 먹고 잠만 자며 보냈어. 가끔 핸드폰하고. 책을 읽지도, 영화를 보지도, 글을 생각하지도 않았어. 날 몇 주간 지독하게 괴롭히던 어떤 종류의 집착 같은 게 묵은 때 벗겨지듯 사라지더라. 좋아하는 DJ의 믹스를 듣고, 수시로 책상을 치웠어. 한창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서 덴마크에 있는 친구와 미팅도 했어.


그러다 이튿날, 책을 읽었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가>. 한국에서 가져온 책이야. 내가 요즘 쓰고 있는 글과 장르적 유사성이 있어. 한 페이지 정도의 짧은 장면 글쓰기랄까. 물론 보르헤스가 쓰면 시고, 내가 쓰면 습작이지만. 나는 새 책에 대한 이상한 강박이 있어서 절대 접지도, 줄을 긋지도 않는데, 종이책에 대한 미련이 그 강박을 이겨 버렸어. 미국에서 가장 슬퍼질 때는 바로 내가 원하는 책을 찾으러 서점이나 도서관에 바로 가지 못한다는 점이야. 그래서 어제는 140불어치의 종이책을 주문하기도 했어. 어쨌든 내가 줄을 그은 여러 문장을 좀 소개할까 해.


예전에 이미 겪은 적이 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러나 또한 환희와 희망과 호기심에 차 그 모든 일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기억의 심연으로 하강했다. 그 길이 끝없이 느껴져 아찔했으나, 마침내 잃어버린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기억은 꿈에서나 눈길을 줄 만한 것이었기에 빗속의 동전처럼 반짝였다. – <작가> 12p
용기는 인내심 문제요. 어떤 이들은 더 인내하고, 어떤 이들은 덜 인내하오. 하지만 조만간 다들 인내심이 다하는 법이오. – <망자들의 대화> 29p
운명은 반복, 변주, 대칭을 좋아한다. (중략) 그는 자신이 동일 장면의 반복을 위해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 – <플롯> 31p
*생전이었는 사후였는지 모르지만, 역사는 그가 하느님을 대면하고 이렇게 말했다 곁들인다. “하릴없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 되었던 저는 단 한 사람, 바로 제가 되고 싶었다나이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돌개바람 속에서 대답했다. “나 역시 내가 아니니라. 나의 셰익스피어여, 그대가 그대 작품을 꿈꾸었듯이 나도 세상을 꿈꾸었고, 나의 갖가지 꿈의 하나가 바로 그대이고, 그대는 나처럼 수많은 자이자 그 누구도 아니니라.” - <전부 혹은 전무> 48p (이 글은 전문을 다 읽어 보길 추천할게. 정말 좋아.)


이 책을 다 읽으면 새로 주문한 책이 한 무더기 오겠지? 나 오늘 땅을 치고 후회했잖아. 배송비 아끼려고 한 번에 10권 가까이 주문한 거라 빠뜨린 책 없나 여러 번 확인했거든. 그런데 김승일 신작 시집을 깜빡한 걸 좀 전에 알게 되었어. 나, 잠긴 목청으로 절규했어.


그리고 미카엘 하네케 영화를 두 편 봤어. <퍼니 게임>과 <피아니스트>. 저번 <히든> 때부터 느꼈는데, 이젠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아. 나 하네케 좋아하는 것 같아. 가끔 그런 순간이 와. 어떤 감독의 호흡이 내가 숨 쉬는 호흡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걸 발견하는 순간. 좋아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아주 쉽게 좋아할 수 있게 돼.


저번 첫 번째 편지 이후로 이치코상에게 쓰다 구겨버린 편지가 벌써 세 통이야.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 작업에 대한 고민도, 내 방 소개도, 내 산책 속 잡담도, 아무것도 이치코상에게 닿지 못할까봐 겁이 났어. 당신이 소중해질수록 더 망설이게 돼. 우습지.


그래서 어떤 것도 쉽게 정할 수 없겠어. 괜히 호언장담했던 어제의 내가 매일매일 부끄러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요즘은 확실한 게 제일 불확실해 보여. 어쩌면 불안해 보여. 그래서 감각을 믿어보려 해. 보고 싶은 사람을 열심히 보고 싶어 하고, 배고픔을 원동력 삼고, 무기력을 낚아채 보려고. 이치코상이 알려준 건데, 기억나? 지치면 자라며. 잠이나 많이 자게.


*추신

뉴욕은 여름이야.

너무 춥다. 이렇게 예쁜 풍경을 상상 속 여름에 집어넣어 본다. 지금처럼 매섭지 않고 선선한, 다정한 강가 바람을 맞으며 나는 책을 읽을 것이다. 햇살이 강하니 선글라스를 쓰고 있을 것이고, 주말마다의 독서 피크닉에 내 피부를 그을릴 것이다. 풀밭에 넓은 스카프를 깔고 누워 있으면, 저 멀리 아이들이 던지고 노는 공이 우연히 내 머리맡에 떨어질 것이고, 나는 그걸 주워 들어 아이들에게 다시 건네 던진다. Thank you! 하는 신나는 외침에 기분이 좋아진다. 공원을 산책하는 행인들 수만큼의 강아지들이 있을 것이고, 가끔 호기심 넘치는 강아지는 나에게 다가와 냄새를 맡는다. 그럼, 강아지와 대화하는 부류가 아닌 나는 반려인과 얘는 몇 살이야? 이름이 뭐야? 아니 너 말고 강아지 이름, 따위의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나는 뉴욕의 여름을 매일 꿈꾸며 혹독한 추위를 버틴다.

추울 때 쓴 내 여름 소망 일기. 역시 사람은 꿈을 꿀 때 가장 행복해. 꿈에서 깨자마자 심한 몸살감기를 앓으며 여름을 맞이하고 있잖아.


그리고 이치코상의 답장 잘 받았어. 울컥했는데 울진 않았어. 우리에게 이런 아이러니는 소중해.


보고 싶어. 또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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