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란 건 없는 단어야.
무심코 바라본 달력의 숫자가 조금 어색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달력을 2장이나 넘기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푹 내쉰다.
"와... 무슨 시간이 이렇게 빠르냐..."
보통 뮤지컬은 2-3개월 정도 진행하는데, 공연을 하다 보면 월요일을 제외한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회 내지 2회의 공연이 매일 숨 가쁘게 흘러가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아채는 단서라고는 나무에서 돋아나는 초록 잎사귀나, 말라붙어 떨어지는 낙엽,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가 전부.
스륵 스륵 달력을 넘기니 눈에 들어오는 빨간 숫자.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나에게는 미간에 힘을 주게 하는.... 불편한 그 이름. 연휴.
"(날짜를 눈으로 훑으며) 음... 이번 주에 연휴가 껴서.... 아... 어쩐지 2회 공연이 많더라니..."
기획사는 다음 주 공연 1회 차까지 끌어다가 연휴에 2회 공연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이번 주만 잘 넘기면... 다음 주는 좀 괜찮을 거야... 아 근데 이 스케줄은 진짜 너무하다..."
뻐근한 어깨에 파스를 대충 붙이고 극장으로 향한다.
"*마티네는 누가 만든 거야? 혼 좀 나야겠어."
"진짜 누구예요? 가만두지 않을 거야! 2회 공연은 우리 돈 두배로 받아야 해 정말로!"
분노의 다림질(?)과 수선을 하며 썽을 내는 크루들이 참 귀엽다.
"그래도 우리 담주에 1회 공연 많으니까, 이번 주만 힘내보자~ 아! 아까 디자이너 선생님이 케이크 우리 먹으라고 주고 가셨어. 딸기케이크야!"
"와~ 진짜요?!? 왔다 갔다 하면서 먹어야지~"
복도 끝에서 앙상블 배우가 눈을 감은 채로 지나간다.
"아이고ㅋㅋㅋㅋ 배우님 눈 떠요! 넘어진다~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힘들게 눈을 뜬다) 우으으.. 안녕하세요오.... 낮공 안 하다가 공연하니 잠이 안 깨네요... 큰일 났네...."
그는 스트레칭을 힘겹게 하며 몸을 풀러 연습실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간다.
저녁공연만 하는 요일에 낮공을 준비하려니, 다들 몸이 아직 덜 깬 모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그렇게 낮공연 시작 전, 소대에서 대기 중인데 갑자기 애플워치가 붕-붕 울린다.
으아아!!!!! 내 앞에 서있는 이 배우는 아주 예민한 배우라고!!!!!!!!!
'하 씨... 뭐야?!'
다급하게 손목을 가려 통화를 거절한다.
'나 핸드폰 무음모드 잘했지?! 안 울리지?!'
물론 공연 시작 전에 매너모드는 잘했지만, 앞치마 주머니의 휴대폰이 한번 더 울릴까 봐 손을 살짝 넣어 확인한다. 너무 놀랜 탓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헛기침을 한다.
막이 오르고 배우가 모두 무대에 등장한 뒤에 여유가 생긴 틈을 타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는데, 망할 내 친구 '백구'다.... 이 자식을 어떻게 해줄까....^^ (백구는 그녀의 별명이다.)
화가 너무 나지만 소리를 낼 수 없는 난, 발만 동동 구르며 분노의 카톡을 날린다.
Lahee : 날 죽일 셈이야??? 오늘 누가 공연하는지 알아?!?!?!?!?
백구 : ㅋㅋ 그럴 것 같아서 끊었어 ㅋㅋㅋ 죽일 셈 까지는 아니었고 ㅋㅋㅋ
알고 보니 사소한 궁금증이 생겨 물어보려 카톡을 한 거였고, 간단하게 답변을 해준 뒤 다시 공연에 집중한다.
(이 친구는 그다음 주에 같은 실수를 한번 더 해서 나한테 욕을 먹게 된다. 제발!!!! 백구야!!!!!! 또 한 번 더 그러면 엉덩이를 차줄테다!!!! )
그렇게 무사히(?) 낮공을 마친 뒤... 극장 안의 화장실이 좁은 탓에 스태프 들로 너무 붐벼서 더 넓은 로비 화장실을 이용하려 밖으로 나갔는데, 연휴라 그런지 가족단위 관객들이 많다.
아이들은 예쁜 드레스와 구두를 신고 한껏 상기된 발걸음으로 엄마 아빠와 손을 꼭 잡고 걸어 다니고 있고,
벤치에 앉아있는 예쁘고 멋진 남녀 커플은 얼굴을 맞대고 공연의 내용을 흥미롭게 이야기한다. 로비의 전구색 조명은 따스하고 중앙에 높게 서있는 트리는 아주 크고 화려해서 눈이 부실 정도다. 평소 같으면 별생각 없었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 모습들이 따뜻하고 조금 서럽다.
저녁공연까지 마친 밤. 크루들을 모두 보내고 시계를 보니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는 내일도 아침에 출근해서 낮공연, 저녁공연을 준비하겠지, 그리고 또 11시에 끝이 나겠지.
문득 허기가 느껴져 크루들이 먹다 남긴 부서진 케이크 앞으로 걸어가서 포크로 푹, 푹 케이크를 먹기 시작한다. 입안 가득 이미 케이크가 있는데도 멈추지 않고 케이크를 찍어서 꾸역꾸역 구겨 넣다가,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꾸욱 오므린다.
케이크가 참... 달다.
Merry Christmas.
*마티네 : 프랑스어 matinée 에서 온 말로, ‘아침·오전’이라는 뜻이며 한국에서는 주로 낮 시간대에 열리는 연극·뮤지컬을 가리킨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