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냄새
멋진 로봇들이나 전사들이 등장해서 포즈를 취하는 순간, 객석에서는 엄청난 환호성이 들린다.
"안녕! 친구들!"
"와ㅏ아아ㅏㅏㅏㅏㅏㅏㅏ!!!!! 안녕하세요!!!!!! 진짜 멋있다아!!!!!"
"방금 여기로 악당이 지나가지 않았니?"
"악당 저기 지나갔어여~!!! 저기루!!!!! 방금~!!!!!"
등장인물들은 마이크가 없기에 녹음된 음성에 따라 손짓 발짓으로만 연기한다. 아주 폼나게!!
아이들은 같이 따라갈 기세로 악당들이 퇴장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몸을 반쯤 일으키고 공연에 집중한다.
그리고 곧이어 시작된 엄청난 전투씬.
풍차 돌리기, 백텀블링, 멋진 발차기들이 난무하고 악당들은 우수수 무너진다. 액션 아동극의 경우 태권도 전문 선수나 아크로바틱 선수들이 주로 무대에 오른다. 물론 숙련자들이지만, 헬멧을 쓴 채로 어떻게 격한 액션들을 소화하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그 멋진 가면 속에 은은한 술냄새가 가득하다는 걸....
매일 공연이 끝난 저녁에, 배우들은 항상 술을 마시러 갔는데(편협한 시각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은 술을 잘 마시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전날도 마찬가지였더랬다. 그중 한 배우가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시고서는 몰래 극장에 들어와서 잠을 자다가 아침에 출근한 단장에게 걸렸고, 화가 많이 난 단장은 그에게 얼차려를 과하게 주다가 결국 분에 못 이겨 뺨을 때렸다는데, 턱을 맞은 그는 그대로 넘어져서 가벼운 뇌진탕이 왔고, 커버도 없는 설상가상의 상태여서 (정말 비상식적 이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 상태로 공연이 진행되었다. 당사자 배우는 괜찮다,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제대로 진행될 리가.....
그는 무대에서 풍차 돌리기 한번 하고 퇴장하자마자 헬멧을 벗고 헛구역질을 하고, 다시 나가서 백텀블링을 하고 소대로 돌아와서 휴지통을 붙들기를 반복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제발 헬멧 안에만 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내가 싫었다. 일본에서 받아온 오리지널 의상이라서 그대로 보내야 한단 말이야.....ㅠㅠ
그렇게 손에 땀을 쥐는 치열한 전투의 끝은 결국, 정의의 승리!
아이들은 기뻐서 소리 지르고, 난 의상들이 모두 땀에 젖어서 돌아올 생각에 소리 지르고....
"고생하셨습니다~ 쫄쫄이 가져갈게요~"
의상이 걸린 행거를 챙겨 의상실로 이동해서, 그대로 풍선 건조기에 넣는다.
이 극장은 세탁기가 없는 극장이라 평일에는 세탁을 할 수가 없어서 (일요일에 세탁소를 보내기 전까지는)이 방법뿐이다. 땀냄새가 그대로 쫄쫄이에 배어버려 다시 입기 힘들겠지만, '으으 진짜 싫지만 어쩔 수 없어...'라고 중얼거리며 의상을 건조기에 넣어 두고 나서 헬멧 안쪽의 땀들을 물티슈로 닦아내고, 악당들이 입는 탈 안쪽도 닦아낸다.
공연하던 계절은 시리고 시린 한겨울이었는데, 의상실이 무대 바로 옆이라는 이유로 온열기구를 절대 들여놓지 못하게 했었다. 무대 아래 지하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한기에 기모레깅스와 누빔치마, 수면양말과 털신까지 신고 있었지만 추위에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던 나는, 쫄쫄이를 말리기 위해 켜는 드라이기를 꼬옥 안고 있는 게 행복할 지경이었다.
"의상쌤~ 많이 춥죠??"
무대감독님이 무언가를 품에 안고 눈치를 살피며 의상실로 들어온다.
"(쫄쫄이를 말리며) 드라이기 없었으면 전 여기서 동사했을 거예요. 진심으로."
"이거 원래는 안되는 건데... 여기 너무너무 추워서 안되겠다 싶어가지구 가져왔어요..!"
외투 안에서 슬쩍 꺼내 보여준 건... 전기방석!
"(놀라며) 이거 설치 해도 돼요?? 극장측에서 안된다고 그랬잖아요..!"
"아니 사람이 죽겠는데..!!! (의자에 방석을 놓고 코드를 꽂으며) 사용 다 하고 코드만 잘 뽑으면, 괜찮을 거예요!"
"진짜 감사합니다..ㅠㅠㅠㅠ (방석을 만져본다) 우와 순식간에 따뜻해지네...!!"
"(윙크) 우리만의 비-밀!"
너무너무 추웠던 날, 마음이 따뜻해졌던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