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운데 있던 사람이 나야 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다 보면, 한 장면이 끝나고 모든 불이 꺼진 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며 이전 장면에서는 멋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던 배우가 눈 깜짝할 사이 잠옷을 입고 등장하는 그런 광경들, 많이 보셨을 거다. 하지만 크게 눈치챌 수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음, 침실이군!’ 혹은 ‘음, 과거의 이야기군!’ 하며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며 지나가기 마련이다.
평균 3분-5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며, (작품에 따라 훨-씬 여유 있을 때도 있다) 대부분 소대에는 ‘퀵룸(Quick Room)’이라 부르는 작은 공간이 있다. 주연과 조연의 경우에는 주로 대기실이 가깝게 위치하여 대기실 안에서 갈아입는 경우가 흔하지만, 퇴장하고 3-40초 내로 다시 등장해야 하는 경우에는 앙상블들의 퀵룸을 같이 사용하거나 주인공만의 퀵룸을 별도로 만들기도 하고, 그마저도 갈 시간이 없는 경우 무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체인지를 하기도 한다.
유난히 퀵체인지가 많았던 작품이 하나 있었다. 주인공이 퇴장하면 가발을 바꾸면서 화장을 고쳐주는 분장팀이 기본 3명에, 마이크를 체크하는 음향팀이 2명, 옷을 갈아입히는 의상팀 2명이 붙어서 체인지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한 나머지 각자 파트의 체인지를 완수하기 위해 팔꿈치로 옆에 서있는 상대방을 밀어내는(?) 그야말로 전쟁통이 따로 없는 대혼란의 퀵체인지였다. 그중의 정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무대 정중앙에서(!) 진행하는 의상 체인지가 하나 있었으니.
"Ooh~ What ever you want~"
여자 주인공이 감미롭게 노래의 운을 떼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자 앙상블들과 함께 나란히 한 줄로 무대로 들어간다.. 관객석은 차마 바라볼 수도 없다. 너무너무 떨려서!!!
체인지부터 퇴장까지 허락된 시간은 단 45초. 주인공이 카디건을 벗으면 속옷만 입은 상태 이기 때문에 배우의 앞과 옆은 여자 앙상블들이 둘러싸서 가림막을 만들어 주고, 깜깜한 무대에 *핀 조명 단 한 개만 배우의 얼굴만을 동그랗게 비춰 최대한 몸이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진행한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여배우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로 그녀가 신고 있던 쪼리에서 스트랩하이힐로 갈아 신기는 것.
배우가 신고 있는 쪼리를 슥슥 벗어서 앞으로 내밀면 받아서 한쪽으로 치우고, 고개를 살짝 들어 미니원피스에 발을 넣어 잘 입고 있는지 확인한다. 가끔 오른발 구멍에 왼발을 넣으니까!
' 음 오른발, 왼발 잘 넣었군. 다행이야. 드레스가 잘 올라가고 있어. 이제 신발을 신기자'
내가 신겨야 하는 신발은 아주 얇~은 여러 겹의 금색 스트랩이 발을 감싸고 있는 샌들 디자인의 하이힐.
그걸 신어야 하는 배우는 맨발. 땀 때문에 신발에 부드럽게 들어가지도 않지만, 무대에 꼿꼿이 서서 열창을 하고 있는 가수의 발은, 정말이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게 여자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인가…??? 언니... 언니 발 좀 들어봐 봐요....’
톡톡톡톡 치고, 흔들고, 약간 간지럽혀도 보고(?) 용을 쓰면... 오!!! 조금 들린다.
'지금이야!!!!'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발을 잡아 구두를 신기면, 스트랩 사이로 발가락이 빼-꼼 나온다.
그런데! 발가락이 이상한 위치에서 나온다.
‘오 주여...! 언니 거기 아니야 아 진짜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오 제발…!!!’
식은땀을 흘리며 엄지손가락으로 발가락을 힘껏 밀어서 제대로 된 위치를 잡아주면, 스트랩을 발에 맞게 잘 당기고 발목 후크를 걸어준다.
‘와 이제 됐다.. 이제 오른발만 하면 되는데... 발 좀 들어주세요 제발ㅠㅠㅠㅠㅠㅠㅠ'
(톡톡톡톡톡톡...)
"I'll do it naturally~"
조금 있으면 도입부 부분이 다가온다. 서둘러야 해!!!! 조명이 켜지면!!!!! 난....!!!!!!!!!
거의 울면서 구두 스트랩이 잘 잠겼는지 다시 한번 흔들어 확인한 다음, 벗은 쪼리를 냅다 들고 등장했던 방향과 반대쪽 소대로 다급하지 않은 듯 다급하게 퇴장을 한다.
‘해냈다!!!!’
'아이고 장하네!!!!'
일렬로 서서 대기를 준비하는 여자 앙상블들이 따봉을 날리며 축하해 주는 것도 잠시,
"It's all in me~~~~ yeah!!!!"
빰! 빠~~~~~빰! 빠-밤!
내가 빠져나옴과 동시에 그녀들이 무대로 등장하며 화려한 조명들이 동시에 촤!!! 하고 켜진다.
말 그대로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순간. 근데 이럴 시간 없어. 다음 체인지 하러 가야 해.
난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1분 즈음에 들려오는 비트체인지 구간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노래는 바로 Whitney Houston의 I’m Every Woman.
*핀 조명 : 반경이 작은, 배우를 따라다니는 스포트라이트(Spot 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