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병의 저주, 30일의 유예
수현은 지독한 혼란 속에서 깨질 듯한 두통을 부여잡았다. 어젯밤, 분명 효주가 택시에 태워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짧은 귀갓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아, 머리야... 꿈이 아니었어.”
신음하며 거실로 나온 수현의 시선이 식탁 위에 멈췄다.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검은색 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병을 보는 순간, 안개처럼 뿌옇던 어젯밤의 기억이 조각조각 맞춰지기 시작했다.
속이 좋지 않아 택시에서 잠시 내렸던 편의점 앞. 다시 차를 잡으려던 수현에게 한 노파가 다가왔었다. 백설처럼 하얀 긴 머리카락에, 기이할 정도로 세월을 비껴간 고운 피부를 가진 노인이었다.
“아가씨, 오늘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 “네~ 아주 끝내주는 일이 있었죠! 그나저나 할머니, 정말 고우시다. 젊었을 때 인기 장난 아니셨겠어요.” “늙은이 놀리니까 재밌수? 많이 취했구먼.” “진심이에요. 저는요, 할머니... 이 예쁜 모습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거든요. 늙지 않는 영원한 마법 같은 게 있다면 참 좋겠는데.”
수현의 취기 어린 주정에 노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검은 병을 건넸다.
“그런 마법이 있다면 이 늙은이한테도 좀 알려주게나. 자, 이거 마시고 속 좀 풀어.”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숙취해소제인 줄로만 알고 단숨에 들이켰던 그 액체. 수현은 당장 그 노파를 찾아야 했다. 전무 승진 후 첫 출근 날에 이런 괴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수현은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꽁꽁 싸맨 채 어젯밤의 편의점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공원 벤치 근처를 유유히 거닐고 있는 노파를 발견했다.
“할머니! 할머니, 잠시만요! 저 기억하시죠? 어젯밤에 만났던...!”
노파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하며 수현을 바라봤다.
“누구...?”
변해버린 외모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수현은 절박하게 외쳤다.
“저예요! 영원히 아름답고 싶다고 했던 그 아가씨요! 기억하시잖아요!”
그제야 노파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아, 어제 그 아가씨구먼. 하루아침에 얼굴이 아주... 역동적으로 변했어.” “기억하시는군요! 제 얼굴,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그거 숙취해소제 아니었나요?” “마셨구먼, 결국.”
노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수현은 노파의 옷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돈이 필요하세요? 얼마든지 드릴게요. 제발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주세요. 예전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돈은 무슨.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한테 돈이 다 뭐야.” “그럼 제가 뭘 하면 되나요? 뭐든 다 할게요!” “방법이 있긴 하지.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수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노파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30일 안에 아가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남자를 찾아. 단, 조건이 있어. 아가씨도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야만 해. 진실한 사랑만이 마법을 풀 수 있지.” “네? 그게 무슨... 이 얼굴로 어떻게 남자를 만나요?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그건 아가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싫으면 평생 그 모습으로 살던가. 난 갈 길 가네.”
노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수현은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본 사이, 노파는 마치 안개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회사에는 뭐라고 해야 하지? 이 얼굴로 출근할 수는 없어.’
넋이 나간 채 집 앞으로 돌아온 수현은 또다시 굳어버렸다. 아파트 입구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안민재가 서 있었다.
(저 인간, 하필 오늘 또...)
민재와 눈이 마주친 찰나, 수현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다행히 모자와 마스크 덕분인지 민재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수현은 도망치듯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수현은 약통에서 수면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자고 일어나면... 눈을 뜨면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을 거야. 이건 그냥 지독한 술병일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수현은 무거운 잠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