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Destroy, to deconstruct

파괴하고 해체해라

by 지진창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분명 21세기의 명화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 프로필 사진을 이 영화의 스틸컷이나 포스터로 해놓은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사랑받는 영화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무언가 꼬여있고, 비틀어진 영화임과 동시에 다른 영화만큼이나 직설적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던진다.

난 그래서 단연코 <이터널 선샤인>은 해체주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멘타인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한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의 소제부터 ‘사랑은 절대적인 감정‘이라는 우리의 사고를 해체한다.


전통적인 로맨스는


-사랑은 기억된다.
-사랑은 운명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을 삭제한다.
-사랑을 삭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를 반복한다.


영화에서는 ‘사랑’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고정시켜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진행되고 언어에 의미가 뒤로 밀려가게 구조를 설정해 두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는 해체주의 이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Meaning is endlessly deferred in language, never present in itself, always in relation.”


“언어 속에서 의미는 끝없이 지연된다. 그 자체로는 결코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며, 언제나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


그리고 이 영화에는 해체주의 특성을 띈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이 영화의 흐름은 선형 구조와 비선형 구조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에 존재한다.


이 영화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기억‘을 따라간다.

겉으로 보이는 현실 세계는 시간 순서대로 흐르지만, 조엘의 기억 속 세계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감정과 사건의 순서를 뒤섞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정리된 인과보다, 흩어진 감정과 균열 난 자아를 먼저 만나게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시간 구조를 넘어서, 기억과 자아, 사랑이 얼마나 해체 가능하고 재구성되는가를 질문하는 작품이다.



출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전통적인 미술관의 관념을 깨고, 금속과 곡선을 이용하여 마치 흐느적거리고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출처: Maison Margiela 2017 SS Artisanal 컬렉션

몸이 옷을 입는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옷 위에 여성의 얼굴을 담아냄. 옷 자체로 얼굴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사회적, 윤리적 통념이 그어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자본주의와 법치주의 아래에서 다분히 노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되는 삶에서 가끔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해체주의는 그 매너리즘에서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암묵적으로 지켜야만 했던 규칙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1000년이 넘게 우리는 종이에 적힌 글을 보며 정보를 전달받고 교육받아왔지만, 이제는 상당수의 교육기관에서 태블릿과 모니터로 교육을 한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의한 결과물이라고만 볼 수 없다.
누군가의 해체주의 철학이 담긴 창의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청바지를 입는다.때론 그 바지가 찢어져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패션으로 인정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오래 입은 청바지의 일부분을 찢어, 마치 새로운 옷을 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아주 오래전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에도 해체주의적인 시도를 한 극작가가 있다.

그 이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더 오랜 과거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연극이 지켜야 할 [삼일치 법칙]을 이야기했다.

연극은 비로소 ‘같은 날, 같은 공간, 하나의 플롯(사건)‘을 다루어야 한다는 규범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극은 어떤가?

햄릿은 덴마크 왕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심지어 궁 밖을 나가기도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족, 사랑, 우정, 욕망 등 다양한 플롯을 다루고 있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그런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화는 훨씬 더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구조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해체주의는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단순하다.

기존의 틀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거다.

해체하고, 분해하고, 비틀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끝없이 발전하고 발전하여 더 이상 새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는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한 해체에 책임져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고, 또다시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막연하게 빙글빙글 도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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