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의 도
에스파뇰(Espagnole)은 ‘스페인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이 소스는 프랑스 궁정에서 체계화되었다. 17세기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 요리가 국제적 영향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스페인 요리법이 일부 섞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19세기 에스코피에가 정리한 5대 모체 소스의 하나가 되었다.
깊은 갈색 소스가 입안에 퍼지는 순간, 묵직한 풍미가 혀를 감싼다. 에스파뇰 소스는 화려하지 않고 무겁다. 그러나 그 무게 속에는 역사의 질감과 제국의 긴장감이 녹아 있다. 프랑스 궁정 요리의 전통을 지탱하는 근본이자, 서양 소스 문화에서 가장 장중한 목소리를 내는 존재다.
에스파뇰 소스는 다크 루(dark roux)에 송아지 뼈와 채소를 오래 끓여 만든 브라운 스톡을 더해 완성된다. 토마토와 향신채가 들어가면서 산미와 감칠맛이 더해지고, 긴 시간의 조리 끝에 특유의 묵직한 맛이 탄생한다.
그 색은 어둡고, 맛은 진하며, 향은 깊다. 마치 긴 역사의 무게를 입 안에 담아내는 듯하다.
에스파뇰 소스는 프랑스 요리에서 ‘맛의 중심축’ 으로 기능한다. 벨루테나 베샤멜이 부드럽고 중성적인 반면, 에스파뇰은 깊고 진한 풍미의 구조적 기반을 제공한다. 고기의 감칠맛, 채소의 단맛, 와인의 산미가 어우러져, 한 접시의 요리에 무게감과 균형을 부여한다. 오늘날 데미글라스 소스, 브라운 스튜, 스테이크 소스 등 대부분의 갈색 소스 계열은 모두 에스파뇰에서 비롯되었다.
요약하자면, 에스파뇰 소스는 브라운 루와 송아지 육수, 토마토, 향채를 바탕으로 한 깊고 진한 갈색 소스로, 프랑스 요리에서 육류와 사냥요리의 풍미를 완성하는 핵심 베이스이다.
에스파뇰은 혼자만의 소스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파생 소스를 낳는 모체다.
데미글라스(Demi-glace): 에스파뇰을 다시 절반으로 졸여 만든, 프랑스 고전 요리의 심장.
보르도 소스: 와인을 더해 스테이크를 장엄하게 만드는 소스.
샤스르 소스: 버섯과 토마토, 허브를 더한 사냥꾼의 소스.
즉, 에스파뇰은 서양 요리의 무거운 브라운 소스 세계 전체를 지탱하는 ‘제국의 수도’ 같은 존재다.
재료: 송아지 뼈·소고기 뼈, 당근·양파·셀러리, 토마토 페이스트, 버터·밀가루, 향신료(월계수, 타임 등)
조리:
뼈와 채소를 오븐에 구워 깊은 색을 낸다.
버터와 밀가루로 만든 다크 루에 브라운 스톡을 붓는다.
토마토 페이스트와 허브를 넣어 몇 시간 동안 끓인다.
체에 걸러 맑고 진한 소스를 얻는다.
영양: 뼈와 채소에서 우러난 미네랄과 단백질이 담겨 있다. 지방 함량은 다소 높고, 열량은 진한 농도만큼 크다.
칼로리: 100ml 기준 약 120~150 kcal이다.
조리 핵심 비법
뼈와 채소를 반드시 구워야 색과 풍미가 깊어진다.
불은 낮게, 시간을 길게 두어야 맛이 완성된다.
마지막에 체로 걸러내야 비단결 같은 질감을 얻는다.
1. 육류 요리(Meat Dishes)
Boeuf Bourguignon (쇠고기 부르기뇽) : 와인과 함께 졸인 소고기 스튜로, 에스파뇰이 기본 베이스가 된다.
Tournedos Rossini (투르네도 로시니) : 소고기 필레에 푸아그라와 트러플을 얹고 에스파뇰 계열의 소스를 끼얹은 고급 요리이다.
Roast Beef with Demi-glace (데미글라스 로스트비프) : 에스파뇰을 줄여 만든 데미글라스 소스를 곁들인다.
Veal or Lamb Stew (송아지·양고기 스튜) : 고기의 풍미를 감싸주는 기본 베이스 소스로 사용된다.
2. 파생 소스(Derivative Sauces)
에스파뇰 소스는 여러 파생 소스의 기반이 된다.
Demi-glace (데미글라스 소스) : 에스파뇰과 브라운 스톡을 다시 절반으로 졸여 만든 진한 소스이다. 스테이크나 스튜에 사용된다.
Bordelaise (보르도 소스) : 데미글라스에 레드와인과 샬롯(Shallot 양파와 마늘의 중간쯤 되는 향을 가진 작은 구근 채소), 뼈골수(Bone Marrow 소, 송아지, 양 등의 뼈 안쪽에 들어 있는 지방질의 부드러운 조직)을 넣어 만든 소스로, 소고기 요리에 어울린다.
Chasseur (샤쇠르 소스) : 에스파뇰에 버섯과 와인을 넣은 사냥꾼식 소스이다. 닭·오리·야생고기 요리에 사용된다.
Robert (로베르 소스) : 에스파뇰에 양파와 머스터드를 넣어 만든 소스로, 주로 돼지고기 요리에 사용된다.
3. 야생고기 및 사냥 요리(Game Dishes)
Venison Stew (사슴고기 스튜) : 고기의 강한 향을 부드럽게 감싸주기 위해 에스파뇰이나 데미글라스를 사용한다.
Duck à la Chasseur (오리 사냥꾼식 요리) : 버섯과 와인으로 풍미를 더한 에스파뇰 계열 소스를 쓴다.
에스파뇰 소스는 밝고 가벼운 소스가 아니다. 그러나 그 묵직함 덕분에 스테이크와 사냥 요리는 깊이를 얻는다. 마치 역사의 무게가 문화의 성숙을 낳듯, 어둠은 풍미를 깊게 한다.
에스파뇰은 말한다.
“깊은 맛은 시간이 만든다. 그리고 무게 속에서 비로소 풍미가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