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사의 마술 3

말맛

by 나일주

접속사의 마술 3 그럼에도, 다만, 따라서, 이처럼, 혹은.

-이들은 접속사 중에서는 말맛의 중간관리자쯤 되는 사람 사이를 조금 더 매끄럽게 만드는그 조용한 기술자들이다




접속사 이야기를 세 번째나 하고 있다는 건 나도 좀 접속사에 진심이 됐다는 뜻이고, 읽고 있는 당신도 슬슬 말에 민감해졌다는 뜻이다.


좋다. 이제 본격적으로 접속사의 숨겨진 에이스들을 소환할 시간이다.


1편은 주연, 2편은 씬 스틸러,


3편은 일명 말맛의 중간관리자들이다.




첫 번째 주자는 ‘그럼에도’다.


긴 이름, 진중한 태도, 살짝 문어체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접속사는 기가 막힌 반전을 감춘다.


“모든 조건이 불리했다. 그럼에도, 그는 해냈다.”


이 접속사가 등장하면 왠지 사람 하나 세워줘야 할 것 같고, 배경에 BGM 깔아야 할 것 같고, 눈물 흘리면서 “그럼에도…” 하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일어날 때 나오는 말이다.


자신을 이긴 자들이 사용하는 접속사다. (물론 현실에선 '그럼에도'가 나오기 전에 일단 커피부터 한모금 마신다.)




다음은 ‘다만’.


얘는 약간 변호사 느낌이다. 말을 부드럽게 조정하면서도, 꼭 하고 싶은 말은 한다.


“좋은 발표였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오버됐네요.”

( 해석: ‘좋긴 한데 좀 길었어.’)


‘다만’은 아주 유능한 중재자다. 말을 부드럽게 돌리면서도 본론은 놓치지 않는다. 사랑 고백에도 쓸 수 있고, 팀 회의 피드백에도 쓸 수 있다.


“넌 정말 멋져. 다만… 우리 사이는 그게 아닌 것 같아.”


이 말 한 줄에 설렘과 절망이 동시에 담긴다. 접속사의 밀땅 능력치 1위.




이어서 ‘따라서’.


이 친구는 논리와 인과의 화신이다. ‘그러니까’의 정장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계약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행이 어렵습니다.”


말은 공손한데, 거절은 확실하다.


‘따라서’는 딱딱하고 공적인 분위기에 강하다. 논술, 회의록, 거절 메일 3종 세트엔 거의 필수다. 그런데 이 접속사가 들어간 문장을 친구한테 쓰면 “너 왜 갑자기 그렇게 말해? 무섭게…”란 말이 돌아온다.


말의 온도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그리고, 숨겨진 인싸 접속사 ‘이처럼’.


말을 예쁘게 마무리하고 싶을 때, 얘만 한 친구가 없다.


“이처럼, 접속사는 말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다.”


어딘지 있어 보이지 않는가?


이처럼’은 나의 말을 종합해주는 착한 정리꾼이다. 게다가 말 끝을 부드럽게 내려주는 기능도 있다. 대화에선 잘 안 쓰지만, 보고서나 자소서에선 대활약.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선 은근한 인기 접속사다. (문장 끝에서 조용히 칼퇴하는 스타일.)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주자. 말맛계의 최고의 양다리, 접속사의 스파이,


바로 ‘혹은’이다.


‘혹은’은 책임지지 않는다. 선택도 안 해준다. 그저 말을 해놓고 “둘 중 하나야~” 하고 빠져나간다.


“그는 천재다. 혹은 미친 사람이다.” (…당신이 정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미워할 순 없다. 애매함은 때때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문장이야말로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 ‘혹은’은 시, 소설, 철학책에 잘 어울린다.


단점은?

대화에서 너무 자주 쓰면 “그냥 결정을 좀 해…”라는 말이 돌아온다.




자, 오늘도 몇몇 접속사들의 등장으로


말의 표정은 달라졌고,

생각의 결은 깊어졌고,

글의 온도는 조율되었다.


언어는 결국 관계의 기술이고, 접속사는 그 기술의 윤활유다. 문장을 조금 더 부드럽게, 사람 사이를 조금 더 매끄럽게 만드는그 조용한 기술자들.




그러니까 말이다—


삶이 어렵고 말이 꼬이는 날, 그럼에도’라고 적어보자.


조금 더 말하고 싶은 날엔 다만’을 붙여보고,


논리를 세우고 싶을 땐 따라서’로 차분히 이어가자.


혹은… 그냥 아무 말 없이 라면을 끓이는 것도 방법이다.


이처럼 접속사의 세계는 넓고, 우리의 말은 아직도, 한참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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