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서툴렀던 사람

안녕, 낯선 사람

by 서늦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 택시 안의 공기는 뜨겁고 무거웠다. 말이 없었다. 음악도 꺼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만이 또렷했다. 차가 멈추고 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좀 걷고 올게.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다은은 아무 대꾸 없이 먼저 문을 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이 있다는 걸, 이럴 때마다 수현은 더 실감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각자의 문을 닫고, 그렇게 떨어졌다. 숙소에 혼자 들어온 다은은 조명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진동이 울렸다. 수현이었다.

“아침에 들어갈게. 편하게 자.”

그 말이 너무 수현 같았다. 불편함에서 도망치는 방식, 익숙한 거리두기. 참았던 한숨이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다은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시간에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한다는 거야.”

“진짜 생각 좀 하고 싶었어. 감정이 너무 겹쳐서…”

“그러니까 네가 기분 나쁘면 그냥 나가버려도 되는 거야? 너 혼자만 감정 있니? 들어와. 마지막까지 이기적으로 굴지 좀 마.”

전화를 끊고 몇 분이 흐른 뒤, 문이 열렸다. 수현이 들어섰다. 서로 마주 보는 그 몇 초 동안,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다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게 뭔지, 너 알아?”

수현은 숨을 고르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얼마나 참고, 조심하고, 너한테 맞추려고 애써왔는지… 그런데 너는 언제나 도망치듯 선을 그어.

네가 불편하면 바로 벽을 세우잖아.”

“나도—” 수현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나도 계속 참고 있었어. 네 감정 눈치 보느라 말 못 하고, 상처 줄까 봐 조심했어. 근데 너는, 늘 네 감정만 말해.”

다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조심이었어? 말 안 하고 사라지는 게 조심이야?”

“그러면 넌 왜 매번 나한테 쏟아내? 난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 그걸 알면서도 계속 몰아붙이잖아.”

다은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표정은 무너진 게 아니라,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말했어. 서툴러도 괜찮다고. 그냥... 네가 나한테 진심이면 된다고. 근데 넌 한 번도, 내가 혼자 얘기하는 것 같단 생각을 없애준 적 없어.”

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그 창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다은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만하자, 수현아. 이젠 나도 지쳤어.”

말을 끝낸 다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을 챙겼고, 현관 앞에서 잠시 멈췄다. 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은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낯선 정적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다은이 사라진 자리엔 말 대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되짚고 싶은 말들, 하지 못한 말들, 어긋난 오해들이 창백한 조명 아래 떠다녔다. 무엇이 처음 어긋났는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하나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감정이 가라앉기도 전에 방 안은 갑자기 커다란 무대처럼 느껴졌다. 너무 많은 장면들이 동시에 지나갔고, 수현은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 밤, 수현은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불 꺼진 천장을 바라보다 그저 눈을 감고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희미한 햇살이 커튼 사이로 번졌다. 새벽까지 잠을 설치던 수현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다은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방 안엔 서로의 말 대신 침묵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수현은 옷을 챙기고, 숙소 문을 조용히 닫았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하늘을 향해 기울고 도시가 작게 줄어들던 순간, 수현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 아래로 스쳐가는 구름과 낯선 풍경. 그 모든 장면이 마치 소리를 잃은 영화처럼 멀고도 낯설게 느껴졌다. 한참을 지나,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 다은은 어디쯤일까.’

그 생각 하나가 이별보다 더 오래 가슴에 머물렀다.


연말의 겨울은 언제나 사람들을 조금 들뜨게 만든다. 거리에는 웃음이 많아지고, 약속도 늘어나고, 익숙한 인사들마저 괜히 따뜻하게 들리는 시기. 하지만 그해 겨울, 수현은 그 모든 풍경에서 유독 한 발짝 멀리 서 있었다. 말보다 생각이 많았고, 웃음보다 침묵이 먼저였던 시기였다. 그 밤, 수현은 생전 처음 어딘가에 마음을 걸어보았다.

“서울 사는 30대 직장인입니다.
혹시… 같이 이야기 나눌 분 있을까요.”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던 밤. 다음 날 아침,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 저도 서울에 사는 직장인이에요.”

별것 아닌 인사말이었는데, 그 말 한 줄이 무너지려던 하루를 아주 조금 바꿔놓았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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