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마음, 먼 언어
정원에서 돌아오는 길, 수현과 다은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고, 길 위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두 사람 사이엔 작은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지 않았다.
그 조용함이 평화로운지, 아니면 어딘가 불편한지 알 수 없는 채로 숙소에 도착했다.
하루의 햇살이 남긴 따뜻한 잔재들이 방 안에
희미하게 번져 있었고,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을 땐, 어쩐지 몸보다 마음이 더 무거웠다.
수현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잠깐 잠이 든 다은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
뭔가 말을 꺼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얼굴을 오래 보고 싶었던 걸까.
그 눈빛은 말 대신, 마음의 무게만 덜어냈다.
잠에서 깬 다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수현은 늘 그랬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먹고 싶은 거.”
익숙한 대답이었다. 처음엔 배려라 생각했고,
그다음엔 다정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점점 다른 얼굴을 하게 됐다.
책임을 돌리는 듯했고, 마음을 닫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선택하는 순간까지도 나에게 맡기고는
그 안에서 자신을 숨기는 듯했다.
숙소 근처, 다은이 미리 알아봐 둔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기름 냄새, 지글거리는 소리, 테이블마다 넘치는 대화들 속에서, 둘은 여전히 조용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맥주잔을 부딪치며 잠깐 웃었고, 그 웃음에 마음이 풀리는 듯했지만,
다은은 눈빛을 피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민서랑 얘기하다가 네 얘기가 나왔어.”
수현이 고개를 돌렸다.
“내 얘기? 왜?”
다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걔가 그러더라. 왜 그런 사람을 만나냐고. 그렇게까지 참고 만날 이유가 뭐냐고.”
수현의 손이 멈췄다. 불판 위에서 고기를 뒤집던 젓가락이 허공에 잠시 멈춰 있었다.
당황, 민망, 그리고 묘한 서운함까지.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입을 열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수현은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맥주잔을 집어 들고, 술보다 말을 먼저 삼키며 말했다.
“…그런 말 듣게 해서 미안해. 근데,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다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엔 불쾌했어. 그래서 말했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테이블 위 연기가 천천히 올라오고, 불판 위의 고기들이 익어가며 작게 울었다.
수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감정이 스쳤지만, 동시에 미안함이 따라왔다.
그런 말을 듣게 만든 것도, 그런 입장에 다은을 세운 것도 결국 자신이었으니까.
다은이 이어서 말했다.
“근데 수현아… 사실 나, 그 말 들었을 때, 속으로 잠깐 고개를 끄덕였어. 무의식적으로. 그게 더 싫었어.
누가 널 그렇게 말한 것보다, 내가 거기에 동의했다는 사실이…”
수현은 말을 잃었다. 반박도, 설명도, 사과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은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내 감정을 외면한다고 느껴. 무슨 말을 꺼내면 넌 조용하고, 그냥 듣고만 있잖아.
대답도 없고, 질문도 없고. 마치, 그 얘기를 꺼낸 내가 스스로 정리해야 하는 사람처럼 느껴져.”
수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상처 줄까 봐 그랬던 거야. 말이 무기가 될까 봐.”
다은은 웃었다. 짧고 가벼운 웃음이었지만, 그 안에 오래된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 안 해봤어?”
그 말엔 대답 대신 맥주잔이 다시 들렸다.
“나, 너랑 얘기할 때 점점 나만 애쓰는 느낌 들어. 말 하나 꺼낼 때마다 눈치 보고, 조심하고.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뭘까. 관계라는 게 그런 거야?”
수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다은이 말한 그 조심스러움이, 익숙했다.
분명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외면했던 감정이었다.
수현은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라면… 정말 미안해.”
다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맥주잔 속 기포처럼 떠오른 말이 맴돌았다.
“미안하다는 말, 이젠 아무 위로도 안 돼. 그 말, 너무 많이 들었거든.”
한동안, 둘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주변 테이블의 웃음소리와 고기 굽는 소리,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공간을 채웠다.
마치 우리가 아닌 누군가의 관계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고, 다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사실 나는 우리가 정말 잘 통한다고 느껴본 적 없어. 늘 말이 어긋났고, 마음이 닿기 전에 삐져나갔어.
그래도 난 애썼어. 어떻게든 다가가보려고. 근데, 그게 계속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나도 지쳐.”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입을 열지 못한 대신, 마음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다은의 마음에는 지침과 실망, 그리고 분노가 엉켜 있었다. 수현의 반복되는 무심함, 공감보다 앞서 나오는 방어적인 말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공감 먼저 해주겠다던 약속을 또 어긴 현실.
그리고 그걸 또 믿은 자신에 대한 자책까지.
조용한 분노는 그렇게 다은의 눈빛을 서서히 식혀가고 있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수현은 다은의 옆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늘 익숙했던 그 얼굴이,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 침묵이, 그 조용한 걸음이.
그날 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더 이상 아무리 들어도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