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학의 종언

문예지 기고문

by 정건우


근대문학의 종언 / 정건우

- 문예지 기고문


『근대 문학의 종언』은 동양이 자랑할 만한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명저名著다. 이 책에서 그는 일상적 개념으로서의 문학은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주장이라기보다는 사실 토로의 정서가 강한 일면이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문학이 아주 결딴이 나서 용도 폐기되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문학 역할이 무척 왜소해졌다는 완곡의 말이다. 정치·경제·환경과 같은 굵직한 사회문제를 혼자 떠맡듯이 행세해 왔던 문학의 기능이 이젠 다른 대상으로 넘어갔다는 말이다. 그 구체로 소설의 역할을 들고 있으며 문학 종언은 결국 소설 역할의 종말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가 말한 후 문학인들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최고의 지성들은 인문학에 종사하지 않았고, 첨단산업 쪽으로 쏠리는 현상들이 그것을 증명하였다. 양식의 먹을거리와 식탁의 먹을거리 중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식탁에 머물렀다는 진단이다. 문학 종언은 일본 것으로 한정했지만, 한국도 수상하다고 했다. 문학평론가 김종철, 시인 김지하 등이 녹색평론이나 생명 부흥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예로 들었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은 협소해지고 특정 분야를 부각하는 전문 대변자적인 역할의 모습이 아무래도 그의 시각에는 미덥지 않았던 모양이다.


책(소설이나 시집 등)이 팔리지 않고 읽히지 않는 현상을 두고 요즘의 한국문학이 막을 내려가고 있다고 진단한다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이 순수문학이든 참여문학이든 상관없이 총체적인 문학의 위기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도 결국은, 문학의 가치와 기능이라는 본질의 부차적인 일시 망각 현상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문학의 가치와 기능을 배움과 가르침, 즐거움 그리고 통합적인 면에서 찾는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이 즐거움이다.

인간의 삶에서 즐거움에 견줄 만한 기쁨과 보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어디에서 그만한 가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가르치고 배우는 것도 다 즐거움의 영역이다. 왜 문학이 즐거운가? 문학의 무엇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자아발견에서 오는 쾌락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 모방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 모방된 대상을 통해 인간은 쾌락을 얻는다고 했다. 이를테면 비극에서, 공포와 연민을 통해 유발되는 갈등과 긴장 그리고 시차로 이어지는 심리적 안정에 의한 정서적 쾌감과 카타르시스로 궁극 되는 자각이 그것이다.


문학은 모방의 예술이다. 발견을 미적인 형태로 치환시킨 것이 문학이다. 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영국의 시인 사뮤엘 콜러리지도 “모든 예술의 공통적 본질은 미를 매개로 해서 쾌락이라는 직접 목적을 위하여 정서를 자극함에 있다.”라고 하였다. 쾌락은 미적 정서를 자극할 것이다. 자극당한 주체는 필연적으로 자아를 의식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서 자아발견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리고 추구하는 쾌락이 지적인 것에 방점이 찍힌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문학을 하는 이유 즉, 쓰고 읽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오락성과 교훈성 때문이라고 본다. 이 두 가지 덕목은 학설로 발전하여 시대에 따라 대립하였다. 이것은 문학의 형상적이고 인식적인 특징을 말함에 다름 아니다. 문학은 즐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의 삶에 기반을 둔 체험이다. 이 고급놀이적인 요소가 물씬한 체험은 독자가 스스로 서 있는 위치를 가늠하게 만든다. 문학 작품이 주는 심상에서 우리는 각자의 기억과 경험에 대입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 의식주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문학은 성냥개비 한 개도 만들어낼 수 없다. 쓰고, 책을 읽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식탁의 풍족함만으로 살아가도록 인간은 단순화되어 있지 않다. 그 불만족의 저쪽 지점에 충족시켜야 할 인격이 있다. 자아발견으로 풍요로워지는 삶이야말로 마땅히 인간이 추구해 볼 수 있는 세상 최고의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즐기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문학의 순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은 감동을 창출해 내고 스스로 존재하는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사는 한 문학도 공생한다. 인간의 삶과 문학은 결코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종언은 있을 수 없다. 문학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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