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오에서 떠오른 기억들
때때로 나는 미친 짓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많은 청춘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그런 기행들을 일삼았다. 대전에서 강릉까지 걸어본다든지, 아이팟만 들고 백마강변에서 노숙을 해본다든지 하는 짓들.
잠실에서 팔당댐까지 걸었을 땐 병윤이와 현섭이와 함께 했었다. 길을 걸으며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다리에서 엄청 큰 거미를 보고 놀란 현섭이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병윤이는 내가 하자고 하는 일엔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갑자기 청주로 떠나자 제안했을 때도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고기를 구워먹자 했을 때도 그래서 경찰 아저씨에게 혼이 났을 때도 우리는 함께 낭만적이어서(미쳐서) 웃을 수 있었다.
10년 전, 나는 사가에 갔었다. 반골 기질이 가장 극심했던 시절, 도대체 사가에서 뭘 할 거냐는, 그것도 첫 일본 여행지로 도쿄나 오사카, 후쿠오카가 아닌 사가를 정했다는 사람들의 물음에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뻔한 길을 가지 않겠다는 반항심 같은 것이었을 거다.
사가는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조용했고, 낯설었으며, 나만의 것이었다. 사가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지도를 한 번 훑어보고는 도공 마을까지 걷기로 했다. 어린 여행자에게 넉넉한 건 돈보다는 시간 쪽이었으니까.
이번 여행에서 나가사키에서 후쿠오카로 향하던 중, 나는 사가 인근의 다케오 시에 들렀다. 역시 10년 전, 첫 일본 여행에서 아무런 계획 없이 들렀던 곳이었다.
다케오역을 빠져나오자 묘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정돈된 모습의 역이었지만, 골목의 배치와 산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은 그대로였다.
“여기서 길을 헤맸었지.”
아마 이쯤에서 구글 맵이 길을 이상하게 알려줘 산을 헤맸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와 땀에 젖어 냄새가 무척 심했던 거 같기도. 도공 마을의 어떤 젊은 여자가 우산을 빌려줬던 거 같기도. 기차역 근처의 쓰러져가는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두 기억난다.
다케오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스타벅스가 들어와 있다는 도서관. 돌이켜보면 10년 전에도 이곳을 찾아왔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나무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높은 천장과 가지런히 정렬된 책장들. 그리고 창가 쪽에 자리 잡은 스타벅스. 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10년 전을 재현하려는 듯했다.
커피를 마신 후, 나는 다케오 신사로 향했다. 웅장한 녹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걸었다. 수령 3천 년이 넘는다는 나무들은 내가 걸어온 길 같았다. 어쩌면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같기도 했다. 신사의 입구에 서자 갑자기 씻을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10년 전에도 이런 감정을 느꼈던가? 그때의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이곳에 섰을까?
손을 씻고 입을 헹구는 정화 의식은 건너 뛰고 나는 본당 앞에 섰다. 동전을 넣고 손뼉을 두 번 쳤다. 무엇을 기원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감사하단 마음만 전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 모든 기억들에 대한 감사.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신사의 처마 밑에 앉아 비를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10년 전의 기억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 어쩌면 과거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비는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엔 이미 반쯤 젖어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비를 맞으며 걸었다. 젖은 신발이 찰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그 기억으로 산다. 대전에서 강릉까지 걷거나, 백마강변에서 노숙을 하거나, 병윤이와 함께 했던 기억이나, 내가 ‘철갑상어’라고 명명했던 삼청동의 우리만의 계곡에서 숨겨 놓은 와인을 따 마셨던 기억으로. 그리고 이제는 다케오의 비 내리는 골목길, 책의 냄새가 가득한 도서관, 오래된 녹나무들이 늘어선 신사의 기억으로.
후쿠오카행 기차를 기다리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기억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여행이란 그 기억들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다 잊고 있었던 거 같은데, 다시 오니 다시 떠오른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여행의 힘이 아닐까?
기차는 제시간에 도착했고, 나는 후쿠오카로 향했다. 젖은 신발이 아직도 찰박거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 10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똑같이 빗물에 젖은 신발로 걸었으니까.
기차 창밖으로 다케오 시가 멀어져 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올 때, 또 어떤 기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