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연-
어린이 도서관 봉사를 끝내고 나오니 오후 세시였다. 날 좋은 토요일, 서연은 분명 희연이 혼자 집에 박혀 심심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터였다. 그러니 한참만에 만나는 남자친구와의 데이트에 챙겨가려고 한 거였겠지... 다시 생각해 봐도 고개만 저어졌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 희연이었기에 아무도 그녀의 주말 일정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희연은 격주 토요일마다 동네 어린이 도서관에 낭독 봉사를 다닌 지 두 달째였다. 시작은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왔던 어느 날이었다. 일반 도서관과 어린이 도서관 건물이 분리되어 있는지 모르고 잘못 들어가게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훑어본 게시판에서 낭독 봉사 모집글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카운터에 가 지원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낭독 시간은 도서관에 놀러 온 아이들에게도 즐거움이었겠지만, 평소 동화책을 읽을 일 없던 희연에게도 명상 같은 치유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루틴화 된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아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에너지의 환기를 시켜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어준 것이었다.
저녁을 먹기엔 이르고, 바로 귀가하기엔 날씨가 아까워 어쩔까 하던 중에 전화가 왔다. 서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온 메시지에 답을 안 했네,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니, 아침에 답장을 못했네. 미안."
"어? 아니 어.. 괜찮아, 아니, 그게."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는 서연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잠시 폰을 띄어 화면을 확인해, 서연이 맞나? 다시 확인을 해야 할 정도로 그녀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재우랑 싸웠나, 왜 이래, 하는 생각과 함께 또 다른 불쾌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왜 그래? 진정하고 말해봐."
"아니 그게... 저기, 나 결혼할까?"
일단 카페라도 가볼 생각으로 길을 걷다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희연이 의식하기도 전에, 두 발이 먼저 멈춰버린 것이었다. 도로 한 복판에 가만히 서서, 두 눈을 껌뻑거리며 방금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검열했다. 나/결혼/할/까/? 결혼한다. 마침표도 아니고 결혼할까? 물음표라니. 나한테 물어보는 건가.
"재우 오빠가... 프러포즈했어! 프러포즈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아니 그보다 서로 결혼 얘기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는데, 멕시코 출장지에서 만난 신혼부부와 대화를 나누다가 내 생각이 났다는 거야, 그러면서..."
당혹감이 서려있던 목소리는 이제 흥분으로 바뀌면서 서연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횡설수설하고 있긴 했지만, 전화 너머의 그녀는 분명 상기된 얼굴로 기뻐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건물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서연과 자신을 본다면 쌍둥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똑같이 생겼어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그거 잘 됐네. 언니, 늘 결혼 생각 없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 아영이도 매일 보고 싶어 했고, 아기도 좋아하니까. 부모님껜 말씀드렸어? 축하 파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서연의 말이 끝났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또 먼저 말이 나갔다. 아영 - 세희의 조카 - 의 이름까지 언급해 가며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말들이, 겉 포장은 어쨌든 축하인 말들이 와다다 쏟아지고 있었다. 희연 스스로도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제발, 그만 멈춰,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입은 계속해서 껍데기뿐인 축하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정말 잘됐다, 둘이 만난 지도 꽤 됐으니까, 재우 선배네 부모님은 만나봤어? 하며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처럼.
"아무튼, 너랑 얘기하니 좀 진정이 된다. 내일 집 올 수 있음 와! 재우 오빠 인사온대."
속전속결이네, 근데 내일 잘 모르겠네, 하며 이제는 희연이 횡설수설하며 전화를 급하게 끊어버렸다. 핸드폰 액정에 비친 얼굴이 - 서연과 똑 닮은 그 얼굴이 - 정말 꼴 보기 싫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똑같이 생겼다면서 도대체 왜.
'너는 왜 연애를 안 해?'
'얼굴 그렇게 쓸 거면 나 줘!'
서연과 세희의 말들이 머릿속을 지나다녔다. 희연이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 해당 주제에 관심 없다며 늘 심드렁한 척 한 이유.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 희연이었기에, 어린이 도서관 봉사와는 차원이 다를,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이유.
희연과 서연이 같이 아는 동아리 선배가 서연에게 소개팅을 제안하던 그 자리에, 희연도 있었다. 정확히 그 선배는 '너네 혹시 연애할 생각 있어? 소개팅 받을 사람?'이라고 물어봤고, 서연은 바로 신나서 나나나! 하며 손을 들었다. 희연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서연이 소개팅남이 너무 신중해서 재미없다고 했을 때도 희연은 그저 웃었고, 서연이 소개팅 이후 한 달이 안되었을 때 환하게 웃으며 고백했는데 받아주었다고, 소개팅남과 사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도 희연은 조용히 웃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짠! 내 남자친구, 재우 오빠. 잘생겼지?"
100일 기념일이라며 희연에게 데이트룩 코디와 화장 조언을 실컷 받은 서연이 자신을 데리러 온 남자친구를 소개해 주었을 때, 희연은 땅이 꺼지는 기분을 느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기껏 거절했던 소개팅에 나온 남자가, 그 남자였다니. 재우는, 인사를 하며, 정말 똑같이 생기셨네요,라고 했다.
'이렇게 똑같이 생겼는데, 참 다르네.'
평생 들어왔던 말이 다시 머릿속을 헤집었다. 똑같이 생겼다면서 왜, 선택받은 건 내가 아닌 건데.
상념에서 빠져나와 걸음을 옮겼다. 짝사랑남에서 언니의 남자친구로, 이제는 형부가 될 그 사람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을 곱씹으며, 2년이란 시간이 지날동안 자신은 단 한 번도 서연과 재우의 해피엔딩을 바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스스로가 끔찍해진 기분으로 희연은 집으로 향했다.
ps) 이 이야기는 원래 '비연애주의'라는 제목으로 희연이가 주인공인 소설이었는데 많은 수정이 있었고 주제도 달라졌다. 아무튼 이 뒷 이야기는 없어서 여기서 어색한 마무리. 희연이 재우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재우는 희연을 왜 모르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언젠가 정리해 볼 수 있겠지.. 그리고 결국 (당연하게도) 전하지 못할 희연의 마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