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2% 확률의 홀인원 목격담
때는 200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어느 골프장이었다. 미국 골프장은 한국과 달리 꼭 4명이 한 팀이 되어 칠 필요가 없었고, 가방을 직접 메고 걸어다니며 플레이할 수 있었다. 조명도 없기 때문에 오후 3시가 넘으면 '트와일라이트' 시간대로 그린피가 엄청 저렴해지는 특별한 시간이 있었다. 고등학교 골프팀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던 시기라 골프 치는 친구들과 함께 주말 트와일라이트 타임에 라운딩을 즐기곤 했다.
그날은 날씨가 좋아서인지 골프장이 꽤 붐볐다. 4명이 함께 치는 팀도 있었고, 혼자서 카트를 끌며 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둘은 걸으면서 치기로 했는데, 앞팀은 3명이었다. 5번 홀부터 그 세 명의 팀이 느리게 플레이하는 바람에 뒤에 있던 팀들이 모두 밀리기 시작했다. 코스 매니저는 전체 코스를 둘러본 뒤 우리에게 한 명을 더 붙여서 플레이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우리 뒤에서 혼자 치고 있던 50대 아저씨와 조인을 하게 되었다.
골프를 다른 사람과 조인해서 치게 되면 누군가는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다르다. 골프라는 스포츠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두세 홀만 치다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관찰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진정성이나 반대로 야비함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미국에서 골프를 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조인해봤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저씨가 가장 다혈질적이었다.
그 아저씨는 골프공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공을 치고 나면 칭찬을 하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세컨샷이 5야드 이내로 홀컵에 근접하면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칭찬하듯 "Good Boy"를 연신 외쳤다. 반면 탑볼이 나거나 슬라이스로 공을 잃어버릴 때면 욕설과 고성이 난무했다. 나와 친구는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2홀을 더 치고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가 될 8번 홀에 도착했다.
워터해저드가 큰 파3 홀이었는데, 블루티와 블랙티는 워터해저드를 넘겨야만 그린에 안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아저씨는 블루티에서 171야드(156미터) 거리에서 샷을 날렸다.
우리 둘은 화이트티에서 쳤는데, 거리가 짧아도 페어웨이에 안착할 수 있는 위치였고 거리는 159야드(145미터)였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따로 움직였고, 우리는 아저씨가 티샷을 마치면 바로 칠 수 있도록 화이트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티샷을 했는데, 하필이면 탑볼이 나서 바로 해저드에 빠져버렸다. F로 시작하는 욕설이 화이트티까지 들렸다. 조인하기 전에 어떻게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평소보다 안 풀리는 플레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 홀에서 들었던 욕설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욕설의 메아리가 잠잠해질 때쯤 아저씨는 하나만 더 쳐보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새 공을 티 위에 올렸다.
아저씨는 호기롭게 스윙을 했고 공은 깃발 방향으로 잘 날아가는 듯했지만, 거리가 짧아 또다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또 욕설이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고요했다. 대신 골프채가 희생되었다. 정말 화가 났는지 방금 쳤던 클럽을 양손으로 잡고 무릎으로 내려찍어 아이언을 두 동강이 내버렸다. 그때 얼마나 조용했는지 워터해저드의 물결 소리가 마치 파도처럼 느껴졌다.
멀리 화이트티에서 기다리던 우리를 의식했는지 아저씨가 티샷을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 둘은 티샷을 날렸는데, 그때 어떻게 쳤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물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그린에 올라갔는지 벙커에 빠졌는지 기억이 없다. 그 다음 장면이 26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있었던 일처럼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티샷을 마치고 가방을 매고 걸어가려는 찰나에 아저씨는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하고 티샷을 한 번 더 치겠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뒷팀이 멀리 있었기에 우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기다렸다. 실망했는지 기대를 접은 듯, 이전 두 티샷보다 힘이 빠진 샷을 쳤다. 하지만 힘을 빼서인지 스윙이 부드러워 보였고, 공도 해저드를 충분히 넘어갈 것 같았다.
놀랍게도 공은 그린 앞쪽까지 날아간 후 그린 위를 굴러가더니 홀컵으로 들어가버렸다! 생애 처음이자 현재까지 내 눈으로 직접 본 유일한 홀인원이었다.
아저씨도 너무 기뻤는지 계속 점프를 했다. 알고 보니 그 샷이 아저씨의 인생 첫 홀인원이었던 것이다. 나와 친구는 다음 샷을 하기 전에 홀컵을 확인했고, 정말로 아저씨가 친 공이 들어가 있었다. 축하한다는 말을 전한 뒤, 우리는 홀을 마무리하고 다음 홀로 이동했다.
아저씨: 얘들아 이건 내 인생 처음 쳐보는 홀인원이야!
나와 친구: 축하드려요!
아저씨는 중간에 조인을 했기 때문에 스코어카드를 따로 적고 있었다. 8번째 홀, -2라는 숫자를 호기롭게 적었다. 하지만 그건 이글이 아니었다. 그 점을 내 친구가 알려주었다.
친구: 근데요. 이글은 아니지 않나요?
아저씨: 왜 이글이 아니야? 홀인원인데.
친구: 아저씨 티샷에서 세번 쳤잖아요.
아저씨: 아...그러네...그럼 파가 되겠구나. 아쉽네...
정의감에 가득 찼는지, 눈치가 없었는지 나도 한마디 덧붙였다.
나: 파도 아니지 않나요? 물에 두번빠지면 두타 벌타잖아요.
아저씨:..........
그렇게 -2는 +2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되었다. 9홀을 마무리하고 아저씨는 볼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렸다. 친구와 나는 남은 9홀을 치는 동안 그 아저씨가 얼마나 웃겼는지 히히덕거리며 라운딩을 마쳤다.
20년이 넘은 지금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그 아저씨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본다. 공이 워터해저드에 빠지면 그때 로컬룰에서는 드롭존이 따로 있었고, 티박스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클럽을 잘못 선택했든, 스윙을 잘못했든 상관없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드롭존에서 다음 샷을 하는 것이 맞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음에도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 상황을 멋지게 만회하겠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 같은데, 사실 생각해보면 나도 골프를 치면서 종종 그런 생각에 휩싸이곤 한다. 물론 골프를 치는 그 순간에는 깨닫지 못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도 그리 이성적으로 잘 쳐본 기억은 별로 없다.
대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골프 스윙을 얼마나 힘있고 멋있게 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하지만, 순간순간의 판단력과 평정심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도 중요한 요소다.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에 당황하더라도 그 상황을 인지하고 차분함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골프를 잘 치기 위한 덕목이라 볼 수 있다.
정말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과연 차분함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드롭존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티샷을 해야겠지만, 드롭존이 있었다면 나는 분명 그곳에서 드롭을 했을 것이다..
나는 골프를 26년 전부터 쳐왔지만 아직 홀인원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아마 죽기 전까지도 홀인원을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홀인원이 나올 확률은 1:12,500, 즉 0.008%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나온 홀인원은 훨씬 더 희귀하다.
ChatGPT의 도움을 받아 계산해본 결과, 내가 목격한 이 특별한 홀인원이 나올 확률은 무려 1:312,500, 즉 0.00032%에 불과하다.
골프장에서든 인생에서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드라마틱한 순간도
결국은 규칙과 현실 앞에서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분노의 순간에 찾아온
기적 같은...아니 비극일수도 있는 그 홀인원은,
어쩌면 골프와 인생의 본질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