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물이 마르는 마을, 관광은 넘쳐흐르다
겨울이었다.
눈은 마을의 숨소리를 덮고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우리는 작은 역에서 내려 발을 디디는 순간, 마치 시간도 하얗게 덮여버린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쌓인 눈은 푸르스름했고, 바람은 숨을 참는 것처럼 가늘고 길게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발소리, 멀리서 덜컥거리는 다다미 문. 모든 소리는 마치 오래된 필름 속 장면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마을은 말이 없었고, 말 대신 눈을 내렸다.
"여기 겨울이 진짜 예뻐요."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이가 덧붙였다.
"아니, 사진이 잘 나와서 그래."
예쁜 마을이라는 말은 그 마을이 '누군가의 렌즈에 담기기 좋은' 구조를 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골목은 단정했고, 전선은 정리되어 있었으며, 스노우캣이 하루 세 번씩 지나간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곧장 온천으로 향했다.
그것은 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여관에 짐을 두기도 전에,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가야만 이 여행이 시작된다는 듯이.
그날 밤, 우리는 낡은 나무 계단을 오르고, 조용한 여관에 도착했다. 료칸의 이름은 손으로 쓴 서예체 간판에 새겨져 있었고, 입구에는 마른 겨우살이와 종이 부적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를 맞이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곳의 목욕탕에는 김이 자욱했고, 안개처럼 뿌연 습기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 벽과 석조 바닥이 있었다.
세 명의 여행자, 그리고 하나의 고요가 그 안에 머물렀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물은 오지 않았다.
"지금은 밤이라 물을 끊었어요."
료칸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오래 준비된 답변처럼 담백했다.
우리는 더 묻지 않았다.
이해한 듯, 혹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밤,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낯설게 만들었다.
물이 없는 온천은, 곧 온천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 몰랐다.
그 침묵 속에 어떤 고갈의 서사가 숨어 있었는지를.
"밤이면 물을 멈춘다"는 말은 처음에는 단지 정기적인 유지관리나 에너지 절약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관리가 아니라, 위기의 징후였다.
이 마을은 온천수로 살아왔다.
수십 년 동안 지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던 물은 마을의 생명줄이었고, 동시에 '관광'이라는 산업의 원천이었다. 료칸에서 제공하는 목욕, 족욕 카페, 온천 테마 스파, 심지어는 온천수로 끓인 계란과 국물까지.
하지만 지하수는 유한했다.
매일 수천 명의 방문객들이 욕조를 채우고, 샤워를 하고, 발을 담그는 사이, 그 지하수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줄어들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물이 빠져나가는 시간은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입니다."
지하자원 연구소의 한 기술자는 말했다.
"그 시간 이후로는 지하수 압력이 너무 떨어져버려요. 보충되는 양보다 배출되는 양이 훨씬 많거든요."
이는 단지 온천의 물줄기가 끊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을 전체의 자원 체계가 한계선에 도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밤이 되면 물이 멈춘다는 것은,
사실은 이제는 마을이 물을 낼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지하수 관측소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이상 징후를 기록하고 있었다.
압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시점이 점점 빨라지고, 회복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어느 해부터는 아예 일부 지점에서는 회복이 되지 않는 시간대가 생겨났다.
관광객 수는 늘어났지만, 물은 줄어들었다.
그 그래프들은 교차곡선을 그리며 조용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기하급수적으로 소비되는 물의 양은, 더는 공급 가능한 지하자원의 순환 속도에 맞지 않습니다.”
보고서 속 문장은 딱딱했고, 현실은 무감각하게 흘렀다.
현지 행정 당국은 이 경고를 받아들이기까지 3년이 더 걸렸다.
그러나 이미, 마을의 수맥은 피로했다.
지난 10년,
이 마을은 ‘감성 여행지’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SNS에는 포근한 김이 피어오르는 족욕탕, 다다미 위에 놓인 유자차, 창밖의 설경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여기서 찍은 사진은 ‘좋아요’를 보장했고, 마을은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로서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인기와 정체성은 다르다.
이 마을은 더 이상 ‘살아가는 공간’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카페가 많아졌고, 기념품 숍이 생겼으며, 테마 료칸이 기존 여관을 대체했다.
‘재생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예전의 공동세탁장과 마을 샘물터는 사라졌다.
그 대가로 들어온 것은 끊임없는 방문객의 흐름이었고,
그 흐름은 마을이 감당할 수 없는 자원 소모를 불러왔다.
“이제는 물을 쉬게 해야 할 정도예요.”
지하자원 전문가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경고였다.
“지금처럼 계속 쓰면, 10년 안에 온천은 말라요. 아니, 이미 마르고 있어요.”
그러나 그 말을 귀 기울여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관광은 여전히 수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관광객이 다녀간 마을인데도, 현지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런 말, 할 수가 없어요.”
료칸 주인이 말하며 웃었다.
“관광객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또 너무 많다고 하면... 모순이잖아요.”
그 웃음은 체념도, 익숙함도 아니었다.
그저, 더 말해봤자 돌아오는 건 없다는 무언의 합의처럼 느껴졌다.
현지인들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작은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심야 시간 온천 이용 제한
외국인 당일치기 입욕 거부
예약자 외 불가, 1일 이용 인원 제한
이 조치들은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었다.
그저 자원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식이었다.
한밤중, 우리는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수증기 없는 타일 벽, 식은 공기, 손끝에 닿은 냉기의 감촉.
온천이란 뜨거운 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어야 했는데, 그날 밤의 세수는 물이 아닌 현실을 끼얹는 것 같았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침내 깨닫기 시작했다.
이곳이 감내하고 있는 고요한 위기를.
우리가 지금까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수건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드라이기는 복도 쪽 콘센트에서 사용해주세요.”
– 료칸의 문구는 친절했지만, 정작 가장 필요한 물은 없었다.
우리는 늘 여행에서 무언가를 ‘받는다’고 생각해 왔다.
따뜻한 물, 깨끗한 침구, 정갈한 식사, 기념품, 친절한 안내.
하지만 그날 밤, 온천수 대신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우리의 감각은 처음으로 전환되었다.
**‘제공받은 것들’이 아니라 ‘소진된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물을 데우기 위해 얼마의 에너지가 들었을까?
밤마다 돌고 있는 펌프는 얼마나 무리했을까?
매일 수천 장씩 소비되는 수건은 어디로 갈까?
야간 근무 중인 종업원은 몇 시에 퇴근할까?
이 질문들은 숙소 이용자의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순간 ‘소비자’가 아니라, 이 시스템의 일부를 조망하는 관찰자가 되어 있었다.
이 마을에서의 여행은, 단지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일상을 가로지르는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인의 지속 가능성 위에 쌓인 여흥이었다.
“온천수가 없다고 불평하시는 손님은 많지 않아요.
대신 그날 이후 다시 오지 않죠.”
– 어느 료칸 직원의 말
불평이 없다 해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불만은 조용히 쌓였고, SNS 후기의 별점과 평점, 조용한 비추천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다시 이 마을의 관광 수요에 영향을 주었다.
현지인은 알고 있었다.
조용히 삭는 물의 양만큼,
조용히 식는 관광의 온도도.
물이 멈춘 공간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소리 없는 타일의 갈라짐, 낡은 배관의 흔적, 밤늦도록 켜진 복도의 불빛.
그동안 감각적으로 소비해왔던 것들이,
그 순간부터는 물리적 부담의 구조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물의 부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행 자체가 가진 소비 메커니즘을 반추하게 만든다.
“온천이 없으면, 이곳은 그냥 조용한 시골마을일 뿐이에요.”
– 어떤 방문객의 말은 차가웠지만, 정확했다.
그 말은 동시에 묻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마을에 왔는가?”
“이 마을은 왜 우리를 계속 받아들이고 있는가?”
질문은 물처럼 깊어졌다.
우리가 씻지 못한 것은 단지 몸이 아니라,
이 여행이 지우지 못한 수많은 책임의 무게였다.
우리는 이 여행을 준비하며 너무도 많은 것을 ‘기본’이라 여겼다.
예약 사이트의 온천 사진을 보며,
객실 내 욕탕이 ‘기본 제공’인 줄 알았고,
체크인하면 곧장 따뜻한 물로 피로를 풀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기본’은, 누군가에겐 무리한 유지였고,
또 누군가에겐 소진을 전제로 한 서비스였다.
그날 밤, 뜨거운 물 대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우리는 처음으로 그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펌프는 몇 시간을 작동할까?
물이 데워지는 데에는 어떤 연료가 쓰일까?
사용된 물은 어디로 흘러가며, 정화 과정은 누가 감당할까?
우리가 ‘기본’이라 부르는 모든 것 뒤에는
사람의 노동, 에너지의 소비, 기술의 부식, 자연의 반응이 있었다.
온천마을의 풍경은 단지 운치 있는 관광지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인프라와 자연자원의 경계 위에 세워진 유예된 풍경이었다.
“밤이면 물을 멈춥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서비스 제한이 아니라,
그 경계가 지금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SNS 속 그 마을은
감성적인 사진 프레임에 담겨 있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노천탕,
분홍 조명 아래 커피잔을 든 여행자,
고즈넉한 전통가옥의 야경.
그러나 그 화면을 벗어나면,
그 공간에는 끊임없는 소음과 이동,
늘어난 쓰레기봉투,
관광객 응대를 끝낸 뒤의 침묵,
그리고 점점 말라가는 지하수위 그래프가 존재했다.
우리는 그 틈 사이에서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였을까?”
“내가 본 마을은, 실제 그 마을이었을까?”
그 질문은 마치 거울 같았다.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리고 그 거울은, 이제는 더 이상 흐릿하지 않았다.
관광지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예전이 더 좋았어요.”
“사람이 많아지면서 다 망가졌지.”
그 말은 흔히 낭만의 퇴색을 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더 깊은 층위의 고백이다.
자원이 지속되지 못한다는 현실,
마을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구조,
그 속에서 마모되어가는 공동체의 서사를 담은 말이다.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고,
너무 많은 것을 흘려보낸 뒤였다.
샘물터는 테마 카페로 바뀌었고,
골목길의 작은 정자는 포토존이 되었으며,
마을의 제례문화는 상업화된 축제 속에 흡수되었다.
예전이 좋았다는 말은,
돌아갈 수 없다는 사후의 통곡이었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목에서 다시 그 마을을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지붕 위엔 말없이 쌓이는 흰 이불 같은 설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숨은 현실의 결은 더욱 선명했다.
물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물을 감싸는 모든 것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의 이면에는,
당연하지 않았던 수고와 고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뒤늦게나마 이해했기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서비스’만을 요구하는 여행자가 될 수 없었다.
-다음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