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단이 가진 가치관의 거리감
기록과 계산의 방식에서도 신입들과 생산팀 사이의 간극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요구하는 기록은 공정 진행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가감 없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기록은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배양기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록서 작성하는 것을 교육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하나 보였다. 박 박사가 검은색 볼펜으로 기록서를 작성했다. 우리 생산 시설의 원칙으로 프린트물의 글씨와 구분하기 위해 파란색 볼펜으로 작성하기로 정했다. 대부분의 제약회사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생산 문서 작성 규칙이기도 하다. 근데 저 볼펜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건지.
"박사님, 기록서는 반입된 파란색 펜으로 작성해야합니다. 들어오기 전에 교육하지 않았어요?"
"볼펜이 안나와서 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꺼내서 썼습니다."
너무 당당한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할말은 해야했다.
"그럼 다른 볼펜을 달라고 하시죠.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건 어떻게 뺐어요?"
"방진복 잠깐 벗어서 뺐어요."
이번에는 내가 잠깐 말을 멈췄다. 제조소 안에서 방진복을 벗었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기 때문이다.
"뭐라고요?"
그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벗었습니다."
"여기가 왜 방진복을 입는 공간인지 아십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외부 오염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이어 말했다.
"사람 옷에서 떨어지는 먼지, 피부 각질, 미생물. 그런 것들이 생산 환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겁니다."
그는 여전히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깐인데요."
"잠깐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생산소 안에서 방진복을 벗는 순간, 그 생산 환경은 이미 오염된 겁니다."
주변에서 기록을 적던 신입들도 손을 멈춘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여기는 의약품 생산시설입니다. 연구실이 아니라고요."
그는 잠깐 시선을 기록서로 떨어뜨렸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대답은 짧았지만 표정은 완전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더 길게 설교할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교육을 하고 있는 김 선임을 불렀다.
"김 선임."
"네, 팀장님."
"이거 마무리하고 입장 규정이랑 작업 절차 다시 교육하세요."
"GMP 입장 절차부터 다시 합니다."
그는 입술을 잠깐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다시 기록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파란색 펜이었다. 하지만 펜을 쥔 손끝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니면 미세한 저항감일 수도 있다.
교육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나오는 길에 복도 끝에서 홍 대표와 마주쳤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그 옆으로 제조소에서 막 나온 박 박사가 합세했다. 아직 신입들은 생산소 안쪽에서 정리중이었다.
"최 팀장, 애들 교육은 잘 돼가? 우리 애들이 똑똑해서 금방 배우지?"
"박 박사, 잘 배웠어?"
나는 엉망이 된 기록서 뭉치를 꽉 쥐며 멈춰 섰다. 차분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대표님, 아무래도 기초부터 다시 교육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생산소는 어려운 듯 보이네요."
홍 대표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나와 박 박사를 빤히 쳐다봤다. 박 박사는 방금 전 피펫 문제로 나와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평소 자신만만하던 눈빛은 간데없고, 누군가에게 억지로 교정받은 아이처럼 잔뜩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홍 대표는 그런 박 박사를 힐끗 보더니,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박 박사의 어깨를 툭 쳤다.
"박 박사, 최 팀장 말 들었어?"
"아무리 연구실에서 잘 나갔어도 여기선 여기 법을 따라야지. 잘 좀 해."
말은 꾸짖는 듯했지만,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 박 박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교수님. 저도 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이 세포주로 논문 쓰고 데이터 낼 때 쓰던 방식이 있는데, 전혀 고려가 되지 않아서 좀 당황스럽네요."
박 박사의 말에 홍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래, 최 팀장. 박 박사 말도 일리가 있잖아.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박 박사는 내가 보증하는 연구원이고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리고 이 연구는 원래하던 사람이라 누구보다 더 잘 알거야."
"처음이니까, 일단은 쉽게쉽게 가자고."
결국 홍 대표는 박 박사를 나무라는 척하며 슬쩍 내 원칙을 무력화시켰다. 박 박사는 그제야 조금 안도하는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나를 대하는 눈빛에는 묘한 거리감이 서려 있었다.
"자, 박 박사. 애들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좀 사줘."
"팀장이 너무 깐깐하게 굴어도 다 잘해보자고 그러는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전하고. 가자고."
홍 대표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박 박사의 어깨를 다독이며 신입들이 있는 실험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 후 안쪽에서 신입들의 기운 없는 대답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대표의 농담에 섞인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박 박사의 뒷모습은 다시 자신감이 충전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공정을 가르치는 사수가 아니라, 그들의 빛나던 연구 성과를 서류 뭉치로 재단하려 드는 이방인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