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생산소의 신뢰
다시 약 2주간의 혹독한 신입 교육이 이어졌다. 그리고 실무 역할 분담을 명확히 나눴다. 박 박사는 이번 비임상 샘플 생산까지만 공정 실무를 맡기로 했고, 그 이후에는 팀 업무 중 품질 관리 분석을 담당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실험실에서 손에 익었던 단백질 분석이나 활성 측정법이 QC 업무와 결이 비슷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비임상 샘플 생산 기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개월 남짓. 다행히 생산 전 진행한 테스트 배양에서는 우리가 목표한 품질이 나왔고, 여러 번 반복해도 데이터는 일정했다. 이대로만 가면 큰 산은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사단이 났다. 비임상 시료 생산을 위한 세포 배양이 마무리되고 세포배양액이 막 수집되던 오후였다. 배양 중간 단계의 단백질 수율 분석 결과를 확인했다.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목표치의 절반도 안 되는 형편없는 숫자였다. 세포 배양에서는 특이점을 찾지 못했지만, 정작 우리가 얻어야 할 유효 성분인 단백질 수율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 정도 양으로는 예정된 비임상 동물 실험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다. 등 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 생산은 실패다.
나는 즉시 김 선임에게 작성한 제조 기록서를 보여달라 했다.
"기록서 좀 보여줘요. 배양 조건에 일탈 있었어요?"
내 물음에 김 선임은 당황한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팀장님. 제가 방금 기록서 확인했어요. 보시다시피 온도, pH, 산소 공급량 전부 설정값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요. 일탈은 전혀 없었던데요."
기록지에는 문제가 없었다. 모든 수치가 정석대로 파란색 글씨로 문제없이 적혀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지난 5번의 생산과 동일한 수치였고, 결과는 비슷해야 했다. 이 난리통에 다들 무슨 일인지 확인하듯 물어봤다. 나와 몇몇 팀원은 기록지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곧장 제조소 안으로 뛰어갔다. 방진복을 갖춰입고 에어샤워를 지났다. 이 시간이 평생같았다. 마침내 배양기 앞에서 제어화면을 거칠게 넘기며 실제 설정값을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배양기의 산소 농도 설정값이 달랐다. 누군가 임의로 손을 댔다. 수치가 낮게 조정되어 있었다. 대용량 배양기에서 이 정도의 미세한 산소 농도 변화는 세포의 대사 경로를 완전히 꼬이게 만든다. 세포들이 죽지는 않지만, 약을 만들어낼 기운조차 없이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저효율 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 있었다.
"이거 누가 건드렸습니까?"
터져나오는 목소리에 뒤따라온 박 박사와 팀원들의 발소리가 멎었다. 그는 제어반 앞에 서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입 제자들 앞에서 이 공정을 더 잘 안다며 큰소리치던 호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방진복도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들어온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스크를 고쳐 썼지만,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팀장님... 그게 연구실에서는 산소를 너무 과하게 주면 오히려 단백질 구조가 깨지는 경우가 있어서요. 제 경험상 이 정도 농도가 수득률이 가장 좋았거든요. 그래서 살짝 최적화를..."
"최적화요? 공정서에 명시된 수치를 임의로 바꾸고, 기록서에는 멀쩡히 원래 수치를 적어놓은 게 최적화입니까?"
내 외침에 박 박사의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단순한 실수의 자책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과시하던 경험이 이런 사단을 냈다. 신입 사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우리 둘 사이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평생을 박사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쌓아온 자존심이, 임의로 바꾼 조건과 조작된 기록지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 번 생산에 들어간 수천만원의 연구비와 수개월의 시간이 담긴 배양액은 이제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작이 되었다.
그때였다. 제조소 문이 거칠게 열리며 홍세진 대표가 들어왔다. 방진복도 입지 않은 채, 흙먼지가 묻은 구두발로 멸균 구역을 짓밟으며 그가 외쳤다.
"최 팀장! 무슨 일이야?"
나는 밀려오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박 박사! 제정신이야?"
홍 대표의 고함이 멸균실의 폐쇄된 공기를 찢었다. 방진복도 갖춰 입지 않은 그의 구두 발자국이 바닥에 선명한 흙먼지를 남겼다. 평소의 인자한 교수님 같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그는 박 박사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다가갔다.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이 배양 한 번에 들어가는 배지 값이 얼마고, 우리가 투자자들한테 약속한 날짜가 며칠 남았는데! 너가 뭔데 공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박 박사는 고개를 쳐박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신입 사원들은 대표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구석으로 물러났다. 홍 대표의 분노는 곧 나에게로 옮겨붙었다.
"최 팀장! 자네는 관리 안 하고 뭐 했어?"
"팀장이면 애들 눈동자 굴러가는 것까지 감시했어야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보고만 있어?"
"대표님, 제가 승인한 공정에는 문제 없었습니다. 박 박사님이 기록을 속이고 장비를 임의로 조작한 것까지 제가 실시간으로..."
"변명하지 마! 결과가 이 모양인데 무슨 말이 길어!"
홍 대표는 씩씩거리며 제어 화면의 낮은 산소 농도 수치를 노려봤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분노 뒤에 숨은 조급함이 읽혔다. 그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믿기 힘든 지시를 내뱉었다.
"이거, 정제 단계에서 농축해. 억지로라도 양 맞춰."
"대표님, 수율이 절반입니다. 억지로 농축하면 불순물 농도가 감당 안 될 정도로 올라갑니다. 비임상 독성 시험에서 변수가 생기면 그땐 정말 끝이에요."
내 만류에도 홍 대표는 내 말을 잘라버렸다.
"안 끝내면 지금 당장 끝이야! 당장 다음 달에 투자사 실사가 있어. 그때 샘플 보여줘야 한다고!"
"박 박사, 자네가 사고 쳤으니까 자네가 책임지고 농축해서 만들어. 알겠어?"
박 박사는 구원이라도 얻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수님. 어떻게든 수치를 맞춰보겠습니다. 농축 배수 조절하면 비임상용으로는 충분히..."
"그렇게는 안 됩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을 끊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꽂혔다.
"농축 샘플로 투자사에게 보여주는건 가능합니다. 외부에 보여주는 용도라면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맞춰보죠."
"그런데 비임상에 들어가는 샘플은 다시 제조하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고. 기한 맞춰서 만들어놔."
홍 대표는 흙 묻은 구두를 돌려 제조소를 나갔다. 박 박사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에는 안도감이 보였다. 그리고 샘플을 어떻게 농축하는지 안다며, 자재를 확인하러 나갔다.
나는 배양기를 바라봤다. 사람은 늘어났고 공간은 복작거렸지만, 멸균된 공기 속에 감도는 적막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기계음은 마치 나를 비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생산소의 규정은, 조작된 기록서와 구두 발자국 하나에 처참히 짓밟혀 있었다.
나는 배양기의 설정값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비임상용 샘플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 위해, 팀원들과 배양실 청소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