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질병이 바꾼 신약 허가 속도: 에이즈 위기

신약 개발과 허가를 가속화하는 제도 탄생

by 영초이


COVID-19 팬데믹 사태를 기억하십니까?


2019년에 창궐한 COVID-19은 단 2년 만에 전 세계 7억 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현재까지 7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국경은 무너졌고 이동은 멈췄다. 마스크는 일상이 되었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생활 규범이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던 접촉과 이동은 위험이 되었다. 이는 현대 문명이 경험한 가장 강력한 전염 위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2020년 말부터 백신을 맞기 시작했다. 바이러스가 보고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백신이 개발되고 접종이 시작되었다. 신약 하나가 시장에 나오기까지 평균 10~15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속도는 이례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전례 없는 팬데믹에 그렇게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는가.


미국 배경의 또 하나의 절박한 시대가 있었고, 속도의 논리로 만들어진 약이 있었다.

지도부딘(Zidovudine)이라는 에이즈 치료제이다.



에이즈(AIDS) 사태: 급격시 퍼지는 20세기 흑사병과 군중의 공포

Close-up Photo of a Report Form · Free Stock Photo (Public Domain)


1980년대 초, 미국과 유럽의 병원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치명적 질환이 젊은 환자들을 덮쳤다. 이전에는 면역이 극도로 약해진 환자에게서만 보이던 감염과 암이 건강했던 청년들에게서 발생했다. 치료제는 없었고 원인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후 1년 만에 미국 CDC가 처음으로 이 질병을 후천성 면역결핍증, 즉 에이즈라 공식 보고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원인 병원체로 규명되었다. 첫 사례가 발생한 이후로 10년 동안 미국에서만 17만 건 이상의 환자가 보고되었고, 1990년까지 누적 사망자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에이즈 진단은 사실상 사형 선고였다. 치료제가 없던 초기의 절망은 단순한 감염병 유행을 넘어 사회적 낙인과 공포를 동반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에이즈는 20세기에 창궐한 가장 치명적인 흑사병으로 기억된다.

(출처: https://www.cdc.gov/mmwr/preview/mmwrhtml/00001997.htm)



지도부딘: 사람 세포가 바이러스 생산 공장이 되는 것을 막는 약

Retrovir packaging Wellcome L0047500 - Wikimedia Commons (CC BY 4.0)


이 절망 속에서 등장한 약물이 지도부딘(Zidovudine), 흔히 AZT로 불린 약이다. 원래 항암제로 합성되었지만 임상적 유용성을 입증하지 못해 상업화되지 못했던 물질이었다. 지도부딘은 역전사효소를 억제하는 기능을 갖는다.


에이즈라는 질병은 이렇게 사람의 면역체계를 망가뜨렸다. CD4+ T 세포는 CD4 단백질을 표면에 갖는 인간 면역세포이다. 다른 면역 세포를 활성화하고 신호를 보내 감염성 입자를 제거하고 항체를 생산하도록 돕는 면역의 지휘관 역할을 하는 세포이다. 그러나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는 CD4+ T 세포 안으로 침투하여 자신의 유전 정보를 CD4+ T세포에 삽입한다. 이 과정에서 RNA를 DNA로 바꾸는 역전사효소(reverse transcriptase)를 사용한다. 그러면 이 세포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HIV 바이러스를 생산해내는 공장으로 바뀌어버린다. 결국 이 세포를 파괴하거나 기능을 망가뜨려버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바이러스 생산 공장이 된 세포는 계속 바이러스를 생산한다. 이렇게 생산된 바이러스가 다시 주변 세포를 감염시키고, 이 악의 고리가 연결되면서 결국 면역 체계 전체가 붕괴되어 버린다. 그 상태가 심화된 단계가 에이즈이다.


1980년대 중반, HIV가 역전사효소를 이용해 자신의 유전 정보를 세포 안에 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이러스 증식의 핵심 단계가 규명되자 이 효소를 차단할 수 있는 물질로 지도부딘이 다시 주목받은 것이다. 초기 임상시험에서 지도부딘은 바이러스 복제를 억제하고 면역세포 수치를 개선하는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완치약은 아니었고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바이러스 증식을 억제한 약이었다.


지도부딘의 역전사효소 억제 기전

1. 사람의 몸 안에서 지도부딘은 인산화를 거쳐 지도부딘 삼인산(Zidovudine-triphosphate, ZDV-TP)이 된다.

2. 이 물질은 DNA의 구성성분인 티미딘 삼인산(deoxythymidine-triphosphate, dTTP)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

3. 역전사효소에 의한 DNA 합성 시에 이 지도부딘 삼인산이 기존 DNA 물질을 대체해서 DNA의 기능을 망가트리는 역할을 한다.

추가 설명. 다행인 것은 우리 몸의 DNA 합성은 바이러스의 방법보다 훨씬 복잡하여 이 지도부딘 삼인산을 구별해 DNA 합성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공포에 의한 사회적 충돌과 이례적인 빠른 지도부딘의 허가

FDA History - AIDS Protest (4898662239) - PICRYL (PDM 1.0)


당시 신약 허가 철학은 지금처럼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다. 충분한 임상 3상을 통해 생존 연장을 확정적으로 입증하고, 장기 안전성을 확인해야 했다. 평균 10년 이상 걸리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에이즈 환자들에게 10년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기다림은 곧 죽음이었다.


환자와 활동가들은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완벽한 데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외쳤다. 그들의 요구는 신약 허가는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었다. 미래의 잠재적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지금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인가를 선택해야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FDA는 결국 첫 임상 시작 후 약 20개월 만에 지도부딘의 의약품 허가를 승인했다. 단, 이 허가 승인 이후에도 임상을 계속 진행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임상 2상이 끝나자마자 이 약의 처방이 허가되었고 유의미하게 치사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약물 승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규제가 미래 부작용보다 현재의 생존을 고려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훗날 또 다른 팬데믹에서 속도를 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 사건이 바꾼 것들


에이즈 사태는 분명 절망적인 위기였다. 그러나 지도부딘의 빠른 대응은 역설적으로 현대 의학 규제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첫번째로 신속 승인 제도(Fast track)가 도입되었다.

과거 신약 허가는 환자의 최종 생존 데이터가 확인되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에이즈라는 시급한 위기 앞에서 FDA는 전례 없는 결단을 내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임상적 이득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면 우선 허가를 내줄 수 있다는, 이른바 신속 승인(Accelerated Approval)의 논리가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완벽한 증명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의 시간을 우선에 둔 역사적 전환이었다.

또한 에이즈 치료 효과를 장기간의 생존율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단기간에 확인 가능한 바이러스 부하 감소나 CD4+ 세포 수 증가와 같은 대리 표지자(Surrogate Marker)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질병의 경과를 예측할 수 있는 과학적 지표를 근거로 먼저 치료 기회를 제공하고, 이후 추가 연구로 실제 임상적 이득을 검증하는 새로운 규제 패러다임의 출발점이 되었다.


두번째로 환자 치료 접근권을 확대했다.

규제의 중심이 환자에게로 옮겨간 큰 사건이었다. 거리에 나온 환자들의 외침은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제도의 맹점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왜 약이 있는데 먹지 못하는가? 이 질문으로부터 임상시험에 참여하지 못한 위급한 말기 환자에게도 시험 중인 약물 접근을 허용하는 확대 접근(Expanded Access)이 정비되면서, 치료 기회는 절박한 환자의 권리로 확장되었다. 위험을 감수할지 여부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구조에서,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구조로 규제의 축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속도에 따른 책임을 지게했다는 것이다.

허가 이전에는 시장의 논리를 따라가는 제품의 영역이었다. 다만 이 사건으로 약은 허가 후에도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빠른 허가를 냈더라도 이 것이 규제의 종착점이 아니라 조건부 출발선이라는 것이다. 빠른 승인을 허용하되, 시판 후 추가 연구를 통해 실제 임상적 이득을 반드시 확인하게 했다. 또한 필요하다면 근거에 따라 조정하거나 철회할 수 있는 구조가 함께 설계되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우리는 COVID-19라는 위기 속에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치료제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 답은 40년 전 에이즈라는 절망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에 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생존을 고려하는 규제로 방향을 틀었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환이 오늘날의 속도를 가능하게 했다.


규제는 위험과 환자 생명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단 하나이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약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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