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는 중정으로 변신한다.
주역 6번 괘 - 天水訟천수송
나는 -ism을 깨는 中正중정으로 변신한다.
중정은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중심을 잡는 것이다. 중간을 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헤겔의 정과 반의 합의를 이루어 내는것 또는 정과 반을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천수송訟은 위에 하늘乾, 아래에 물坎의 괘로, “위는 강하고 아래는 험하다”는 형상을 가진다. 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생명을 살리는 단비가 될 수도 있지만, 차갑게 얼어붙으면 모든 것을 얼어 죽게 하는 겨울이 되는 모습과도 같다.
訟송은 言말씀과 公공평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씀이 공정하게 전달되면 진리의 빛이 되어 만물을 살릴 수 있지만, 만약 그 말씀이 얼어붙어 융통성을 잃으면 이념이 되고, 도그마가 된다. 이념이란 결국 하나의 집단적 신념이며,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고정된 틀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는다.
천수송은 바로 이 얼어붙은 이념과 도그마를 어떻게 깨뜨리고 나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단순한 논쟁을 넘어, 생명을 가두는 경직된 신념에서 벗어나 변화와 유연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진정한 앎과 깨달음은 도그마의 경계를 넘어서 흐를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물이 얼어붙지 않고 흐를 때 생명이 유지되듯, 진리도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될 때 살아 숨 쉰다.
괘사卦辭
訟. 有孚, 窒惕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訟송 – 얼어붙은 이념과 도그마를 넘어
천수송訟은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 이념과 도그마에 의해 얼어붙은 세계를 의미한다. 이념이 신념을 품으면 강한 힘을가지지만, 그것이 경직되면 도그마가 되어 사람들을 가둔다.
有孚유부, 이념 속에는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는 올바른 믿음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념은 점점 굳어지고 신념은 경직된다. 어느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유로운 사유가 아니라, 강요된 확신이 된다.
窒惕질척, 막힐 질 두려울 척이다.
얼어붙은 세계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념이 절대화될 때,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으며, 스스로를 가두는 줄도 모른 채 살아간다. 도그마 속에서 사람들은 숨 쉬지만, 그곳엔 생명이 없다.
中吉중길, 독재자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외친다. 그는 스스로를 진리라 선언하며, 자신이 세운 나라가 곧 이상세계요 천국이라 말한다. 그를 따르는 대중들 또한 그 도그마에 사로잡혀,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 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그것은 이미 죽어 있는 신념의 세계이다.
終兇종흉, 그러나 끝내는 흉하다. 아무리 강한 신념이라도, 고정된 이념은 언젠가 무너진다. 시간이 흐르면 도그마는 균열을 일으키고, 독재자는 몰락하며, 사람들이 믿었던 이상세계는 허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난다. 경직된 신념의 끝은 붕괴뿐이다.
利見大人이견대인, 이념의 족쇄에서 벗어나려면, 깨어 있는 지혜자를 만나야 한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 도그마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不利涉大川불이섭대천, 하지만 혼자의 힘만으로는 도그마의 강을 건너기 어렵다. 오랜 시간 굳어진 신념을 스스로 깨뜨리기는 쉽지 않으며, 때로는 길을 안내해 줄 지혜자가 필요하다. 도그마를 깨뜨리는 것은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깊은 깨달음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訟송은 단순한 다툼을 넘어, 경직된 이념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믿음이 굳어 도그마가 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얼어붙지 않으며,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도그마를 넘어 자유로운 사유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訟이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이다.
단전彖傳
訟 上剛下險 險而健訟.
訟. 有孚 窒惕中吉 剛來而得中也
終兇 訟不可成也. 利見大人 尚中正也.
不利涉大川 入于淵也.
이념과 도그마의 위험성
상강하험上剛下險 – 경직된 이념의 위험성
위는 강하고 아래는 험하다. 단전은 이념과 도그마가 경직될 때 발생하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념(idealism)은 정치적으로 특정한 가치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고, 도그마(dogma)는 종교적으로 교리를 의미하며 절대적 진리로 굳어진 형태다.
절대화된 이념은 자유로운 사유가 아닌 억압과 폭력의 도구로 변질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히틀러의 나치즘과 스탈린의 공산주의는 처음에는 대중을 결집하는 강한 힘을 가졌지만, 결국 내부의 경직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졌다.
이념이 지나치게 경직되면 그것을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려 했던 사람들은 배신자로 몰렸고, 소련에서도 체제 비판자들은 숙청당했다. 이념이 절대적 진리로 자리 잡으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이견이 탄압되고, 끝내 사회 전체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險而健訟험이건송 – 극단적 대립의 현실
단전은 “험난하면서도 강건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극단적 대립이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암시한다. 독재자들은 강한 권력을 손에 쥐지만, 그들이 구축한 체제는 지속되지 않는다. 성경의 계시록에서도 사탄의 패배가 예언되듯,억압과 거짓 위에 세워진 체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늘날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SNS와 유튜브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 골라서 소비한다. 기존 언론의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정치적 팬덤은 더욱 강화되었고, 대화보다는 적대가 난무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서로를 배척하고, 심지어 적대감마저 드러낸다. 이러한 경직된 이념의 충돌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깊은 균열을 만든다.
AI 기술의 발전 또한 이러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 팬덤이 AI를 활용해 특정 이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면, 사람들은 더욱 편향된 정보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결국, 극단적 대립이 더욱 격화되며 사회적 갈등이 심화될 위험이 있다.
尚中正也상중정야 –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균형과 절제, 즉 ‘중정(中正)’을 추구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개인의 주체적인 신앙을 강조하며, 대중 속에서 진리가 희미해질 위험성을 경고했다. 다수의 의견이 곧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성찰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루소의 철학에서 “중정”은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그는 인간이 본래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보았고, 문명화된 사회가 이를 왜곡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이 균형을 이루는 일반 의지를 중요시하며, 본래의 균형을 찾는 삶을 강조했다.
열린 대화와 중정의 중요성
나는 어느 날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지도자를 비판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같은 유튜버가 반대 정당을 비판하는 영상을 봤을 때는 그의 말이 타당하게 들렸고 얼굴도 밉지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람이 자신의 이념에 따라 현실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中正중정을 실천하려면 먼저 열린 태도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의심하고,반대 의견을 경청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단순한 사고의 균형이 아니라, 이념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행동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거나, 종교적 차이를 넘어 공동선을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정치적 이념 갈등을 해결하려면 中正중정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이 가진 신념이 절대적 진리라고 고집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실제로 미국의 정치인들이 ‘중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양극단의 의견을 조율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조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중정을 실천하려면, 상대방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그 속에서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도그마에 빠지기 쉽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사회적 동조 압력(Social Conformity) 등 심리적 기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사실을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기제를 이해하면, 스스로 편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
AI 시대에서는 다양한 관점을 의도적으로 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뉴스나 기사를 읽어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정보 디톡스’(인터넷 사용을 일정 기간 동안 의도적으로 제한하거나 완전히 끊는 과정이다. )를 실천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일정 시간 동안 소셜 미디어나 뉴스 앱을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출처에서 정보를 얻는 습관을 들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향된 시각을 깨고 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이념을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살펴보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중정’을 찾는 과정이다.
不利涉大川 入于淵也 불이섭대천 입우연야– 이념의 늪에서 벗어나기
단전은 “큰 내를 건너기 어렵고, 깊은 연못에 빠질 위험이 있다”라고 경고한다. 이념의 늪에 빠지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고, 결국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깊은 연못에서 빠져나오려면, 자신이 가진 신념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종교적 도그마의 문제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은 종교적 도그마가 어떻게 경직된 사고와 폭력을 조장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성경의 권위를 앞세워 이루어진 마녀사냥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비판적 사고를 억압했다. 종교가 인간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도그마가 되어 공포와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현상이 반복된다. 일부 교회에서는 신앙을 권력과 이익의 도구로 활용하며, 특정 교리를 절대적 진리로 내세운다. 신도들 또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앙이 경직될 위험이 있다. 종교가 신과의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될 때 신앙의 본질은 퇴색한다.
마가복음 7장 – 전통과 본질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강조한 외적 전통보다 마음의 정결을더 중요하게 여겼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비난했지만, 예수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종교적 형식보다 내면의 본질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天水訟천수송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경직된 이념과 도그마를 넘어서기 위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中正중정을 실천하는 것은 단순히 이념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념을 넘어서서 열린 사고와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다양한 관점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정치적 대화에서부터, 종교적 신념까지, 그리고 AI와 정보의 경직성까지,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중정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다.
효사(爻辭)
初六초육 不永所事 小有言終吉
九二구이 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無眚.
六三육삼 食舊德, 貞厲終吉 或從王事, 無成.
九四구사 不克訟 復即命 渝安貞吉.
九五구오 訟, 元吉.
上九상구 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얼어붙은 이념과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初六초육 - 좋은 말을 듣는다.
不永所事불영소사, 어떤 일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이념이나 도그마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해야 한다. 특정 이념에 집착하면 다른 이념이나 타 종교에 대해 적대적이 될 수 있으며, 이를 도구화한 집단이나 권력은 결국 붕괴하게 된다. 변화와 발전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小有言 終吉소유언 종길, 적은 말이라도 들으면 길하다.
어떤 교리나 사상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기존의 신념이 수정되거나 새로운 관점이 등장할 수도 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지만, 행위로 믿음을 입증한다고 한다. 구원받기로 예정되었다면 만인 구원설도 가능할 것이다. 한 가지 해석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천년설이 있으면 후천년설도 있는 법이다.
九二 구이 - 좋은 집단에 참가하고
不克訟불극송, 이념이나 도그마에 빠지면 이기기 힘들다. 정치적 이념도 마찬가지다. 알고리즘을 통해 같은 주장만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반대 진영의 목소리는 모두 틀린 말로 들리게 된다. 이렇게 편향된 사고에 갇히면 건전한 토론이나 이해가 불가능해지고, 결국 극단적인 대립만 남게 된다.
교리를 가장한 그루밍의 위험
교리를 가장한 그루밍은 종교적 가르침을 빌미로 개인을 심리적으로 조종하고 길들이는 행위이다. 이는 신앙의 이름으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거나, 공포심을 조성하여 비판적 사고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정서적 친밀감을 이용해 심리적 의존을 유도하면서,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경제적·성적 착취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건강한 신앙은 개인의 자유와 비판적 사고를 존중해야 하며,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구조에는 경계가 필요하다.
歸而逋귀이통, 돌아서서 도망가야 한다.
其邑人三百戶기읍인 삼백호, 삼백 명 정도의 작은 공동체로 가면 재앙이나 허물이 없다. 이념과 도그마에 사로잡힌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때로는 논쟁을 지속하기보다, 보다 작은 공동체에서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키우는 것이 더 나은 길일 수 있다. 열린 사고와 성찰을 통해, 얼어붙은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六三 육삼, - 훌륭한 선생을 만나야 한다.
食舊德식구덕, “옛날의 덕을 먹는다.”
상왈 食舊德식구덕, 從上吉也 종상길야, 덕이 높은 사람을 따르고 그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貞厲終吉정려종길, 올바른 길을 고수하며 끝까지 견디면 결국 좋은 결과를 얻는다.
或從王事無成혹종왕사무성, 혹 왕의 일을 맡아서 일해도 내가 성공하겠다는 것이 없고 언제나 나라가 성공하는 것이다. 이념이나 도그마에서 벗어나려면 큰 스승을 만나고 인내하며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길은 쉽지 않다. 결국, 인내와 배움을 통해 “終吉종길“을 얻을 수 있다.
九四구사 - 새로운 사상으로 깨어난다.
不克訟불극송, 어려운 송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復即命복즉명, 되돌아서 천명을 깨달아야 한다. 선생만 좇아 다녀도 안 되고, 스스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정도로 돌아가고 천명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신의 변화를 받아야 한다. 자기의 나쁜 성질이, 즉 기질지성이 천지지성으로 바뀌어야 한다. 기독교로 말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
安貞吉안정길, 그래야 마음이 평안히 오고 바르게 갈 수 있다.
이념의 세뇌와 교리의 도그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탈북민이 처음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을 마구 부르며 수령을 붙이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경우가 있었다. 몸은 이남으로 왔지만 정신은 아직 북한에 남아있는 것이다.
九五구오 - 중정이 되어야 한다.
訟, 元吉 송 원길, 깨닫고 나와야 원길이다. 원길이란 중정이 된 것이다. 모든 일에서 치우침 없이 올바른 태도를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이념적 극단, 편견, 독선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사고를 유지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우리의 집단의식이 중정이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마음속이 통하고, 안과 밖이 깨끗해진다. 이는 연꽃의 줄기처럼 중정이 확립된 상태이다.
上九상구 - 방심하면 안 된다.
或錫之鞶帶혹석지반대, “반대”는 전통적으로 권위나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終朝三褫之종조삼치, 아침이 끝날 때까지 세 번 벗긴다. 사람은 반성을 했다가도 무의식적으로 또 길에 쓰레기를 버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집단의식을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 방심하면 다시 집단의식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효사는 九五구오 이다.
”中正중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집단의식(도덕이 결여되어 있다.)이 중이 되고, 중통이 되고, 즉 마음속이 통하게 되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안에서도 깨끗이 하고 밖에 나가서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게 된다. 이걸 중통외직이라 한다. 연꽃이 피는 줄기가 중통외직인데 언제나 줄기 가운데가 뚫려 있고 줄기는 곧게 서있다. 대나무도 외직인데 중통이 아니다. 그래서 주렴계는 애련설을 써서 연꽃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다.
안도 깨끗하고 밖도 깨끗해지는 것이 중정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