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서
1. 1931년 초, 영화관의 엄청나게 큰 스크린 위에 메이너드가 나타나서는, 잘 정돈된 서재에서 불빛에 눈을 깜빡이며,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영국은 거의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운명의 도움으로 살아났었다. 파운드는 붕괴하지 않을 것이며, 물가는 그리 많이는 안 오를 것이고, 무역은 회복될 것이며,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거의 믿을 수밖에∙∙∙∙∙
2. 케인스가 1920년대에 제안했던 정책 제안들이 1930년대에 실천에 옮겨지면서, 영국은 최악의 세계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저이자율 정책을 지지했고 또 일정하게 영감을 불어넣기도 했는데, 그 결과 금본위 시대가 끝나면서 파운드의 대 달러 환율은 낮은 수준에서 관리되었다. 무역수지가 개선되었다. 저금리는 민간 주책 건설 경기를 촉진했고, 이는 다시 경제활동이 살아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회복은 더뎠고, 몹시 불완전했다. 실업은 1933년 중엽까지 20퍼센트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3. 케인스가 환호할 일은 또 있었다. 마침내 1932년 7월의 로잔회의에서 모든 배상이 말소되었다. 영국이 미국에 진 전쟁 부채는 1933년 12월의 명목적 상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4. 케인스는 늘 가격과 환율 안정의 균형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파운드의 평가절하를 환영했던 것은 협소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아니라, 파운드 블록 - 영국 시장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파운드에 맞춰 자신들의 통화를 평가절하했던, 주로 1차 산업 중심의 20여 개 국가들 -을 위해 디플레이션을 야기하지 않는 가치 기준을 제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집단적 평가절하는, 금본위를 고수하던 미국과 프랑스가 이끄는 채권 국가들의 속박으로부터 채무 국가들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5. 몇몇 국가들이 금본위에서 이탈하자 금본위를 고수했던 나라들에서는 디플레이션 압박이 더욱 거세졌고, 그만큼 세계 경기의 회복은 방해를 받았다. 미국 은행들의 거의 절반이 불황으로 파산했으며, 예금자들은 소비 능력을 박탈당했다. 케인스는 나중에 밀턴 프리드먼이 그랬던 것처럼, 연방준비이사회가 미국의 달러 주식이 붕괴되는 것을 막는데 실패했다고 비난했다. 연방준비이사회는 1932년까지 유가증권을 일체 사들이려 하지 않았고, 1932년에는 이미 시기를 놓친 후였다. 살아남은 은행들은 예금 보관소로 전락했으며 더 이상 대출을 거부했다. 이것이 1933년 케인스가 가격 수준을 올리기 위해 국제적 공공사업을 위한 계획안을 만들게 된 맥락이었다.
6. 케인스는 금융 위기가 닥치면 신뢰를 고양하고 저금리로의 이전이 가능해지도록 "건전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총지출 증가를 직접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어떤 정책도 경기회복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7. 케인스는 불황을 자본주의 최후의 위기로 사고하기를 거부했다. '설득의 에세이'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일관된 중심 논지, 곧 경제문제는 ∙∙∙∙∙ 무서운 혼란, 일시적이고 불필요한 혼란일 뿐이라는 깊은 확신"을 강조했다. 1932년 1월 함부르크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는, 회복의 길에 놓은 장애물은 유형의 것이 아니며 "권자에 앉은 자들의 지식, 판단 그리고 견해"라고 말했다.
8. '일반이론'은 세계 불황뿐 아니라 그것의 정치적∙사회적 반향, 특히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확산을 배경으로 기획되었다.
9. 미국 경제의 붕괴 규모는 케인스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미국 경제는 영국과는 달리 경직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전히 19세기 유동성이 남긴 흔적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케인스는 현대 경제체제들의 곤경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침체된 경제의 대표적 사례로서 미국이 영국을 대체하면서, 그의 관심도 "경직성"에서 "불확실성"으로 옮아갔다.
10. 1933년 4월 더블린 강연에서 케인스는 국민적 자급자족의 정도를 높이기 위한 네 가지 제언을 내놓았다. 첫 번째, 그는 "오늘날 국제적 분업의 경제적 이점들이 과거와 마찬가지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경험이 쌓이면서 대부분의 현대적 대량생산 과정은 거의 모든 나라와 기후에서 거의 동일한 효율성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더욱이 부가 증가할수록 1차 생산물과 공법 생산물이 국민경제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국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주택, 개인적 서비스, 지역 설비 등에 비해 줄어들었다∙∙∙∙∙."
둘째, 그는 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결합한 자유무역은 평화를 유지하기보다 전쟁을 도발하기 쉽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특히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에는, 외국인이 국내 자산을 소유하는 일은 "중압감과 적대감을 조성하기" 쉽고, 이런 것들 때문에 1914년 전쟁이 발발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 국가들의 경제적 상호관계가 극대화하기보다는 극소화하자는 쪽을 지지한다. 아이디어∙지식∙예술∙접객∙여행, 이런 것들은 성격상 국제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합리성과 편의성만 확보된다면, 상품들을 국내에서 생산하도록 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금융은 주로 일국적인 문제가 되어야 한다."
셋째, 케인스는 "정치-경제적" 실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성취해 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라는 이상적 원칙에 따라 어떤 획일적인 균형 상태를 강구하거나 그런 시도를 하는 세계의 힘들에 우리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삶의 전반적 운용을 ∙∙∙∙∙ 회계사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어떤 것으로 전환시켰던" 경제적 계산 체제는 스스로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러스킨식 고발을 감행한 이후에, 어리석음, 조급함, 불관용에 대한 경고 몇 마디와 함께 강연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