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문장담당자의 시선
보고체계 개선안은 열 장 분량이었다.
각 부서의 업무 흐름과 승인 단계, 중복된 결재라인을 단축하고, 리더의 판단을 앞당기는 구조였다.
프레젠테이션은 매끄러웠고,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부사장 한 분은 말했다.
“이건 빠르게 반영합시다.”
“이견 없죠?”
“실행은 다음 주부터.”
나는 뿌듯했다.
이게 바로 우리가 기대한 ‘일의 속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개편안은 세 달 후에 원상 복구되었다.
사람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그게 왜 그렇게 바뀐 거예요?”
“누가 이런 체계 만들었나요?”
“이건 더 불편한데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우리는 ‘좋은 결정’을 내렸지만, 그건 ‘충분히 이해된 변화’는 아니었다는 걸.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빠르게 하려고 했던가?”
“지금 우리가 빨리 가려는 건 정말 우리가 원하는 방향인가?”
그건 단순히 의사결정의 문제는 아니었다.
속도에 쫓기며 맥락을 놓친 구조였다.
요즘 조직에서 ‘속도’는 생존처럼 여겨진다.
업무는 빠르게 처리되어야 하고, 회의는 간결해야 하며, 보고는 요약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빠름’이 사람을 따라오지 못할 때 조직은 점점 소음이 많아진다.
이해되지 않은 말, 다시 설명해야 하는 결정, 구성원의 고개가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이는 팀.
속도는 생산성을 높이지만, 공감의 속도와는 다르다.
사람은 빠른 보고에 반응할 수는 있지만, 변화에 납득하려면 시간과 맥락이 필요하다.
한 구성원에게 새 과제를 맡긴 적이 있었다.
나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고 그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지연됐고 결과물은 기대와 달랐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이 업무를 맡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실은… 제 담당이라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그냥 위에서 시킨 일이구나 싶어서…”
그때 깨달았다.
그는 과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지시를 받았다고 느낀 것이었다.
속도는 표면을 빠르게 흘러가게 한다.
하지만 맥락은 그 아래에서 방향을 붙잡고 있는 흐름이다.
나는 그때부터 일을 맡기기 전에, 변화를 도입하기 전에,
‘이 변화가 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먼저 생각했다.
‘빠름’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조직에서 가장 먼저 깨닫는 사람은 인사담당자이다.
구성원이 바뀌지 않을 때, 프로세스가 어그러질 때, 사람이 이유도 없이 떠날 때,
그건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납득되지 않은 흐름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회의 때 말하는 시간을 줄였다.
그 대신 묻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구조가 팀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이세요?”
“이 방식이 여러분께도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이 변화에 감정적으로 부담되는 건 없나요?”
이해받은 변화는 지시보다 늦지만, 지속성은 훨씬 강했다.
한 팀 리더는
우리의 변경안을 앞에 두고 조용히 말했다.
“이거 좋은 내용이에요. 그런데 이게 우리 팀한테 ‘왜 필요한지’를 먼저 설명해 주세요.”
그 문장이 내 역할을 다시 정의해 줬다.
나는
실행의 관리자가 아니라
맥락의 안내자여야 한다는 걸.
지금도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할 때면 그 흐름을 기억한다.
최대한 간결하게, 그러나 충분히 납득되게.
빠르게 설명하되, 느리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
그게 결국 조직의 방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는 걸 이제는 안다.
조직의 일은 점점 복잡해지고 변화는 점점 잦아진다.
그럴수록 인사담당자가 해야 할 일은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틀어지지 않도록 조율하는 일이다.
빠르게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따라오지 않을 때 우리는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설명되지 않은 흐름에 지친 것일 수 있다.
인사담당자는 단순한 안내자가 아니라 ‘이해의 여백’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변화가 가볍게 전달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그 무게를 받아내고, 그 의미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역할을 느린 사람으로서 감당하고 싶다.
이제는 말한다.
“빨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도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말이
조직을 사람답게 만드는
내 방식의 속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