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일로 나를 증명하려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안다.
여전히 쉬는 데 소질이 없는 나는, 힘들지언정 일하지 않는 삶을 꿈꾸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다면, 정말 일하지 않아도 행복할까? 나에겐 그런 시절이 없었기에,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왜 일하는 삶을 원했는지. 스무 살 무렵부터, 나는 단지 내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일이든, 한 번 시작하면 그 일이 내 이름이 되는 것처럼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일까, 무슨 일을 하든 ‘일복’이 터졌다. 누군가는 말한다.
“ 월급쟁이는 받는 만큼만 일하면 돼 ”
하지만 난 이 말에 끝내 동의할 수 없다. 받은 만큼 일하고, 나머지는 외면한다? 나에겐 그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처음 일다운 일을 시작한 곳은 세무사사무실이었다. 주로 업체들의 세금 신고를 담당했는데, 세법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는 사장님들의 가벼운 질문에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언제나 질문에 버벅대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싫었다. 그래서 노트를 하나 만들어 프로그램 사용법부터 기본적인 세법 지식까지 빼곡히 정리해 들고 다녔다. 다 외우지 못하더라도, 그 노트는 내 불안감을 다독이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렇게 2년쯤 지나자 어느새 난 노트 없이도 상담할 수 있게 되었다. 세무사사무실에서의 시간은 ‘ 나는 꾸준히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깨달음과 확신을 처음으로 안겨준 곳이다.
20대의 끝자락에 다니게 된 회사는 유통회사였다. 세무사사무실에서 쌓은 경력 덕분에 경리부서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이직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기존 월급의 두 배 가까운 제안이었다. 그래서일까. 뭐라도 하나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실상은 신입사원이나 다름없었다. 6년간 세무 신고만 해왔던 나는, 회사에서 해야 하는 자잘한 일들조차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출근 시간보다 20분 먼저 도착해 그날의 할 일들을 정리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매출처와 매입처를 구분하고, 상품을 눈에 익히기 위해 회사 카탈로그를 한동안 끼고 살았다. 특히 남들 다 하는 엑셀은 나에게 커다란 벽이었다. 써 본 적 없던 프로그램. 쉬운 수식 하나 넣지 못하는 내가 얼마나 바보처럼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그렇게 나를 증명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건만, 커다란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매입처에 대금 결제를 하던 날, 주지 말아야 할 업체에 어음 발행을 해버린 것이다. 잘못됨을 인지하고 반려를 요청했지만, 업체 반응은 시큰둥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런 실수를 했다는 자괴감에 눈물이 터져 나와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었다. 벌게진 눈으로 구매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어음은 돌려받았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처연히 앉아있는 나에게 이사님이 말했다.
“ 실수할 수 있어요. 원래 돈관리가 어려운 거예요. 다음엔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중요해요 ”
알고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난 내 실수를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난 이곳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실수 한번 했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돈 실수는 하지 않았다. 실제 돈을 만지는 일이었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사님은 최고의 칭찬을 해주었다.
“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박대리가 일을 제일 잘해 ”
일적으로 인정받은 느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모두가 일찍 퇴근하는 명절 전이나 연말에도 나는 수금 때문에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게 내가 할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떤 회사를 다니든, 일이 고됐던 게 아니라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처음엔 단지 돈을 더 벌기 위해 옮긴 회사에서, 어느새 나는 인정을 받고 퇴사할 때까지 그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했다.
그 시절의 나는, 일로 나를 증명하려 애썼다. 고졸에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내가 노력마저 하지 않으면, 사회에 내가 설 자리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완벽해야 했다. 완벽하게 일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를 다그치며 몰아세웠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지금은 그 믿음이 조금은 달라졌다. 사람은 틈이 있어야 한다. 실수를 품은 사람도, 그 실수를 포용해 줄 사람도. 그런 틈이 있어야 조금 더 따뜻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회사에서의 쓸모는 노력하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이 꼭 쓸모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싶다. 뭘 잘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군가에겐 분명 쓸모 있는 사람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그렇듯 말이다.
일은 여전히 내 삶의 중심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은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는 걸, 지난 시간들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건 사람의 마음을 조바심 나게 하고 여유를 앗아갈 뿐이다. 스스로에게조차 칭찬받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팍팍한가. 남의 인정을 바라는 마음보다,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해 주는 일. 그게 진짜 시작이 아닐까.
내가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내가, 제법 괜찮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