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물 아래 있었다

익사하지 않기 위한 기록

by 제환



엄마는 그림을 좋아했다.

하지만 생계는 예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미련만 남긴 채, 그림은 서랍 안에 묻혔다.


아빠는 글을 좋아했다.

하지만 삶은 그의 문장보다 무겁고 거칠었다.

결국 글은 꿈의 일부로 밀려났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그림도 글도 좋아했다.

하지만 좋아한다는 마음은

언제나 실력 앞에서 움츠러들곤 했다.


나는 한때, 글을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다.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국 이렇게 또 몇 번째 글을 쓰고 있다.


부모님의 미련이 어쩌면 유전처럼

내게 흘러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글을 배운 이유는 단순했다.

머릿속의 상상을 꺼내어, 내 손으로 담고 싶었다.

좋아하는 글을 쓰며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환상도 있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나는 유쾌하고 가벼운 글에는 영 소질이 없다.

처음 썼던 글이 ‘꿈속에서 어머니가 준 동그랑땡에

머리카락이 박혀 있었다’는 이야기였을 정도니,

이미 예고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쓸수록, 내 감정이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 문장이 나를 끌어당기고

그 안에서 내가 익사하는 듯한 기분.


결국 나는 긴 글에서 빠져나와

숨 쉴 수 있는 짧은 호흡 속에 나를 숨겼다.



장점은 손에 꼽을 정도면서
단점은 수십 가지를 떠올려.
제게 객관적이라는 합리화 아래 드러나는
스스로를 향한 매도



대략적으로 이런 글들이었다.

500자도 안 되는 글 안에

내 우울과 수치심이 치덕치덕 묻어나는 글들.


그래도 짧은 글은

복사뼈를 스치는 얕은 물 같았다.

거기엔 내가 휩쓸리거나 익사할 위험은 없었다.

그게 유일한 다행이었다.


나는 그렇게,

숨만 간신히 이어갈 수 있는 낮은 수심 속에서

짧은 문장들로 버텼다.


이제는, 그 문장들을 다시 꺼내어 본다.

그 안에 남아 있던 내 감정들,

그 안에서도 살아 있었던 나를,

조금씩 되짚기 위해.


나는 여전히 긴 글이 두렵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내가 남긴 조각들을

단 하나씩이라도 다시 손에 쥐고 싶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짧게 썼던 기록들.
그 조각들을 꺼내다 보면

결국 하나의 이름에 도달하게 된다.


그 이름을 향해

나는 다음 문장을 적기로 한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어쩌면 한 사람에게 보내는

긴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래 작가의 말입니다.

이번 글까진 요일에 관계없이 업로드되었지만

다음 회차부터는 매주 목요일 고정 연재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현재는 예전의 기록들을 새로 정리하며 써 내려가고 있어

이미 공개된 글과 새로 쓴 글이 섞여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언제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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