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냄새나는 오후, 당신의 향기
[그리운 말 한마디] – 유안진 (1986년, 자서 중)
창문을 뚫고 부서질 듯 스며드는 오후 햇살, 눈이 부시지 않을 만큼, 딱 그 정도의 살가운 따뜻함.
카페에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언제 그렇게 잔인하게 뜨거웠냐는 듯, 실내의 냉기가 벽처럼 다가와
한 치 앞의 오후 햇살을 즐길 수 있게 해 주었어.
이제 따뜻한 햇살은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하고, 영자 씨에게 툴툴대던 내 인생을 반성하게 하고, 그렇게 영자 씨의 또 다른 기억을 떠오르게 해 주고.
영자 씨, 지난 주말에 책장 정리하다가 우연히 이걸 찾았어.
책을 내 돈 주고 사는 일은 어지간해선 없던 터라, 처음엔 ‘누가 선물해 준 게 아닐까?’
그게 누구였더라... Y였나? K였나? 하다가 생각해 냈어.
책을 선물하면 보통 앞뒤장 어딘가에 짧은 메모라도 남겨두게 되잖아.
그런데 이 책엔 그런 흔적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 시절 내가 책을 샀을까 싶었는데…
갑자기, 깜짝— ‘내가 샀잖아?’ 하며 기억이 돌아왔어.
그때, 10대 우리 사이에 유안진의 [지란 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이 온통 유행이었는데, 친구의 진심을 간절히 바라던 나이였으니까.
그 수필집을 사려다가, 책표지에 ‘유안진 에세이’라고 적힌 걸 보고 이 책을 덜컥 집어온 거지. 하하;
이제야 나, 정말 좀 창피하다... 흐흑;
그땐 '문학소녀' 같은 말이 좀 간지럽고, '흥부보단 놀부'가 차라리 멋져 보였던 그럴 때였어.
사소한 반항심이었을까? 스테레오타입(stereotype)* 에서 벗어나고 픈 10대의 어설픈 반항.
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놀라운 건,,, 책이 너무 깨끗하다는 거야.
밑줄 하나, 접힌 자국 하나 없이.
시골 마을의 잘 관리된 오랜 기와집처럼, 그저 시간의 흔적만 다소곳이 품었어.
찬찬히 책을 펴서 차례를 훑어보다 눈길이 가는 제목을 골라 한 페이지씩 읽어 내려갔어.
다행히, 어떤 문장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읽긴 했었나 봐.
요즘 책들과는 달리 글자 크기도 작고, 줄간격도 좁고, 인지(印紙)도 붙어 있어.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건, 책값. 3,300원.
세상에... 지금 물가로 따지면 10,000원 정도 될까?
좋은 냄새, 오래된 책냄새.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향긋한 소나무 가지에 불 피워 올리면 이런 향이 날까?
행복을 주는 향, 그리움을 부르는 향, 고요한 가을 산에 홀로 선 듯한 향.
예전에 영화 [내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헌책 냄새가 좋아서 헌책을 모은다."는 여주인공(손예진 님)의 특이한 취미가 막 이해되려고 해.
책하면 내 기억 속 1번 이미지는, 영자 씨가 할부로 장만해 책장 가득히 꽂아두었던 세계 문학 전집이랑 한국 문학 전집이야. 그리고 매일같이 그 책장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당신 모습.
물건 사서 그렇게 뿌듯해하시던 건, 계 모임해서 냄비세트 장만했을 때, 자개로 만든 장롱, 찬장, 거실장 들여놨을 때, 그리고 그 전집들 마련했을 때였던 것 같아. 내 기억엔...
그런데, 그 전집들이 두고두고 내 짐이 되리라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사주셨던 걸로 기억되는데, 책 한 권도 싫어라 하던 나에게 그 전집 세트들은 정말
숨 막히는 고통이었다고.
게다가 한국 문학 전집은 가로가 아닌 세로 활자체였어. 맙소사!
그래서 출판사에서 싸게 판매했으리라 짐작이 돼. 반 값에 샀다고 신나 하셨으니까.
결국, 1권 이광수 님의 [사랑]도 끝내 다 못 읽고, 난 그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는, 영자 씨 기준으로 영 매력 없는 여학생이 되어 버렸지.
그걸 그리 안타까워하시며 당신이 한 권씩 꾸역꾸역 읽으셨는데, 몇 번의 이사 끝에, 결국 모두 정리되었지.
검은 양장 표지,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 하얀 종이, 그리고 빼곡한 세로글씨.
잊히지가 않아요, 아직도. 하핫~
책이 귀하던 시절 오빠 교과서까지 외우며 책사랑에 푹 빠졌던 당신은, 그런 나를 조금은 이상해 하셨지.
"네 아빠를 닮았어." 한탄하시면서...
그러던 영자 씨가, 언제부턴가 책을 안 보시더라.
눈이 아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지럽다며...
그게 신호였을까? 그때 조금만 더 살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만하자, 그만하자." 하면서도 도돌이표 노래처럼, 같은 생각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나.
책 냄새에 기대어 당신을 떠올렸고, 당신 향기를 따라가다 결국 나의 무심함과 마주쳤습니다.
오래된 책처럼 은은하고 좋은 향기를 가진 사람.
우리 엄마, 영자 씨.
너무나도 만져보고 싶은 당신.
포동포동 유난히 부드럽던 당신의 감촉.
끈적이는 것 싫다 바디로션도 잘 안 바르셨는데, 그럼에도 유지되던 촉촉한 살결.
당신 어머니에게도, 남편에게도, 딸인 나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메고, 눈이 시려옵니다.
'다음 생엔, 제 딸로 오세요.' 그렇게 기도하다가 이내 조용히 마음을 접습니다.
능력 없고 이기적인 엄마가 되어, 딸로 온 영자 씨가 또 내 한이 될까 봐.
그 한은 더 클 거 같아서요...
다음 생이 있다면,
꼭 당신이 바라시던 예쁜 모습으로 태어나서, 마음껏 책도 읽고, 하고 싶은 공부도 실컷 하고, 부모님 사랑도 넘치게 받으면서, 당신이 꿈꾸던 좋은 신랑 만나 행복하게, 정말 행복하게 사시길...
영자 씨의 49제부터 지금까지 기도합니다.
그 좋은 모(母)가 제가 될 수 있다면 정말, 원이 없겠다 하면서요~
지금, 당신 옆에 누워 당신의 큰 배를 두 손 가득 안고 당신의 살냄새를 맡고 싶습니다.
킁킁, 하면서요.
당신의 향기가 아른거리는 하루가, 조용히 저물어 갑니다.
*스테레오타입: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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