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주신 오천만 원
"여기 곗돈, 니 몫이다."
"응? 주는 거야? 생활비 드린 건데..."
"아직 니 돈 받아 쓸 노인네는 아니야."
"무슨 맨날 아프다면서... 넣어둬요. 병원비로..."
"그 돈으로 작은 아파트라고 하나 사는 게 어떠니."
('싫어, 난 갈 거야 캐나다로 다시...' 속으로만 삼키며...)
"이걸로 어떻게 집을 사?"
"윤보살이 J동에 있는 딸 아파트를 처분한다더라.
네가 산다면 저렴하게 주겠다 하네.
그 딸도 싫다 노래하더니 결국 결혼을 하는구나.
그리 걱정 없는 집 딸도 결혼을 하는데 너는 도대체 어쩌려고... "
('아, 그만해요. 나는 떠난다잖아.' 속으로 또 생각하며...)
"내 인생 걱정 1도 하지 말고 제발 그대 둘, 영자 씨 정웅 씨
두 분이서 오손도손 살아주시면 나는 정말 소원이 없겠네."
영자 씨, 그건 진심이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품어온 내 진심.
"휴~, 맨날 같은 소린걸... 내가 또 시작했네.
암튼 이건 니 거니 네가 가지고 있으렴."
그렇게 모아주신 오천만 원.
당시 전세금에 이 돈을 보탰다면, 윤보살 님 막내딸의 17평 아파트는 너끈히 살 수 있었지.
대출 없이도 가능했어.
학원가에 있던 그 집은, 작은 평수였지만 인기가 많았어.
자녀들 진학 문제로, 매매든 전세든 수요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거든.
집값이 오르락내리락하였지만, 한 번도 그때 금액 아래로 떨어진 적은 없었지.
지금은 결국 다섯, 여섯 배나 뛰어버렸고.
생각할수록 속이 쓰려.
집 떠나 멀리멀리 달아날 생각만 하느라고,
레버리지, 자기 계발, 투자...
그런 생각들은 하지도 못했으니...
하늘로 훨훨 날린 삶의 기회들이..., 돌아보면 그것뿐이랴.
'어른 말 잘 들으면 떡이 생긴다'고 했는데,
부모님을 미워하느라 얼마나 많은 걸 놓친 건지...
이런 생각도 나는 이제 와서야 해보게 되었네.
그때 나는, 이제나저제나 다시 떠날 날만 손꼽고 있었거든.
그렇게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뜻 밖에 오천만 원을 받고 나니,
왠지 맥이 풀리면서, 이젠 '못 가겠구나' 싶은 거야.
이상하게 빚처럼..., 그 돈은 내 마음을 묶어 버렸어.
꽁꽁, 아프게.
그런 내 속마음을 영자 씨는 느꼈던 걸까.
뇌경색으로 더 깊이 몸져누우셨고,
그 순간 내 안의 갈등은 모조리 정리돼 버렸어.
희망의 문도 조용히 닫혀 버리고.
왜, 왜, 왜...
아무리 애써도 이렇게 안 되는 게 있는 건지.
가슴속 울림으로 귀가 먹먹했어.
영자 씨는 나보다 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걸까?
나를 붙잡기 위한 혼신의 노력이었을까?
나날이 달라져 가는 당신의 모습 앞에서
나는 차마 어디로도 갈 수 없었어.
영자 씨와 나는 서로 소중한 것을 붙잡기 위해
큰 것들을 잃어야 하는 운명이었던 모양이야.
영자 씨, 요즘 모녀 시밀러룩이 꽤 유행인가 봐요.
연륜이 묻어나는 분들도 즐겨 입으시는 것 같아요.
엄마하고 딸이 서로 다른 듯 닮은 옷차림을 하는 건데,
요즘은 연인들도 티 나는 커플룩보다는
이런 자연스럽고 센스 있는 시밀러룩을 더 선호한다지요.
부담스럽지 않게, 하지만 은근히 관계를 드러내 주니까요.
우리도 한 번쯤 해봤으면 좋았을 걸 싶습니다.
영자 씨와 저는 드레스 코드나 취향이 많이 달라서
자주 그러진 못했을 테지만,
특별한 날, 이를테면 영자 씨 생일 같은 날에는
비슷하게 맞춰 입고 길거리를 걷거나
팬시한 레스토랑에서 낯선 메뉴를 시켜 보거나…
그랬다면... 참 좋았을거 같아요.
행복한 당신 얼굴을 오래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장면들이, 왜 이제 와서 자꾸 마음에 맴도는지
그저 속상하기만 합니다.
마음을 달래며... 오늘 하루도 고이 접어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