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인연
시간이 흘러, 영자 씨가 퇴원을 하기로 한 그즈음...
말씀은 여전히 어눌하셨고, 걸음도 조금 불안정했지만, 꾸준히 통근치료를 받기로 하고,
영자 씨 소원대로 퇴원수속을 밟기로 했던 그즈음...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 한 외국인 여성분이 옆 병실로 입원하셨어.
영자 씨, 기억할까?
담당 간호사님은 "어쩌지..." 하며 당황하셨고, 주변사람들은 살짝 들떠 있었지.
지나친 비유지만, 그래선 안되지만, 재미난 불구경처럼 말이야.
그 여자분은 참 하얗고, 많이 예뻤잖아. 인형처럼.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지, 그때는...
나도 영자 씨랑 병원 다니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병실에 입원한 외국인을 보는 건. 그것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을...
나도 좀 떨어져서 관심 없는 척 보고 있었는데,
순간 우리의 영자 씨가 나를 부르며,
우리 큰 딸이 영어를 아주 잘한다면서 도움이 될 거라고 큰소리로 말했지 뭐야.
와, 정말 난감.
'내가 영어를 아주 잘하는 게 맞나?' 생각하고 있는데,
간호사님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리스트 보드를 내밀며 말씀하셨어.
"도와주세요."
간호사님이 알고 싶어 하셨던 건 대충 이런 것들이었어.
1. 질병이 있는지(당뇨, 고혈압, 알레르기 등등), 있다면 언제쯤부터인지
2. 수술한 적이 있는지
3. 가족 중에 유전성 질환(암, 당뇨, 심장병 등)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4. 특별히 복용 중인 약이 있는지
5. 지금 어떤 증상이 있는지
6. 임신 중인지
...
병원에 입원하면, 환자의 상태 파악을 위해 이런저런 사전 점검을 해야 하니까.
영자 씨도 그랬고, 누구나 거쳐야 하는 절차였어.
난 성의껏 도와드렸어.
그런데 3번, '유전성 질환'이라는 말이 그 순간 안 떠오르는 거야.
'뭐더라' 하다가 그냥 이렇게 물어봤지.
"Do any of your family members have a history of 블라블라~
그분은 아마도 "No "라고 대답하셨던 것 같아.
그분의 증상은 배랑 등이 아프다는 거였어.
얼마 전부터 계속 그랬는데, 점점 참기가 어려워진다고...
무사히 문진표 작성은 마무리되었고, 검사 결과는 만성 담석증.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어.
퇴근하고 그분의 보호자로 남편분이 오셨는데, 안 잘생긴 한국분이셨지. ㅎㅎ. 죄송;;
남편분은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며 작은 롤케이크를 사다 주셔서, 우리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나네.
미국 유학시절, 와이프가 영어 튜터였다고 말씀하시며 쑥스러워하시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어.
아마 이런 모습에 와이프가 반했나 보다, 생각했어.
뭐 더 길게 얘기를 나눌 상황은 아니어서 그게 내가 들은 전부였지만,
영자 씨가 잔뜩 궁금해하시길래 얘기해 드렸더니, 웬일이래? 환하게 웃으시겠지?
아주 재미있는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사실, 처음엔 일을 만든 영자 씨가 미웠는데...
그 사소한 일이 도움이 되었다며 고마워하는 분들을 보니, 마음이 참 따뜻해졌어.
영자 씨는 그 별거 아닌 일로 당신의 딸을
맘껏 뿌듯해하셨고.
티를 더 내실까 내가 아주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고. 하하..
어찌 되었든, 뜻하지 않은 작은 해프닝 하나로
영자 씨도 나도 그렇게 병원을 즐겁게 떠나올 수 있었어.
우린 다음 날 오전에 바로 퇴원을 하게 되어
그분 수술 결과는 알 수가 없었지만,
"수술은 잘 되었겠지? 간단한 수술이라니까" 하면서 얼마간은 가끔 화제 삼곤 했었네.
그때마다 영자 씨의 마지막 말은 항상 같았어.
"정말 안 어울리는 커플이었다."고.
영자 씨,
"왜 같은 병원, 같은 과에 입원할 때조차 매번 문진표를 확인해야 할까."
난 그게 불만이고 의문이었어요.
입원할 때마다 늘 똑같은 걸 반복해서 물어보니, 솔직히 짜증이 날 때도 있었거든요.
좋지 않은 기억을 자꾸 머리와 가슴에 되새겨야 하니까요.
지난 차트가 있을 텐데도 묻고 또 묻고...
그럼 차트는, 기록은 왜 필요한 걸까요?
묻고 싶었지만 한 번도 그러질 못했네요 :)
생각해 보면, 환자는 많고 기록은 방대하니까
의료진에게는 누군가 옆에서 꼭 집어 말해주는 ‘족집게’ 같은 존재가 필요했을지도 몰라요.
정답을 빠르게 짚어주는 사람은
어디서나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요.
불만이었지만, 그 덕분에 저도 영자 씨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챙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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