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 미술관 나들이
영자 씨가 입원하거나 퇴원하면
얼마간은 사람들의 병문안이 끊이질 않았고
이런 모습 보이기 싫다 하셨지만,
동네분, 절신도님들, 향우회 회원님들까지
돌아가면서 찾아오시면, 영자 씨의 얼굴색은 환해지셨어.
하지만, 그렇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조금씩 작아져 가고,
영자 씨는 하루하루 시무룩해지셨지.
뭐든 처음 같기는 힘든 법이니까.
그날도 TV에서 하는 노래 방송을 보며 멍하니 계시길래,
일단 나섰어. 콧바람 쐬고 차도 한잔 마시고.
갑작스럽게 나선 길.
영자 씨, 쪼야, 나, 그리고 파파,
우리 모두에게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다정한 가족만의 나들이.
사람 많은 곳에 간다 하면 싫다 하실까 봐 목적지는 말하지 않고, 휠체어부터 차에 실었지.
뇌경색을 겪고 퇴원 후 처음 함께 한 가족 나들이었을 거야. 아마도.
가을이 서서히 스며든 인사동 골목, 종로 골목 끝자락의 경인미술관.
전시실로 향하지 않고 우리는,
미술관 속 한옥 찻집 [전통다원]으로 발걸음을 옮겼지.
전통차를 마시며 미술관을 감상하고
휴식도 함께 취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전통찻집.
이 좋은 가을 풍경의 운치도 느낄 겸,
우리는 야외 카페 분위기의 정원에 자리를 잡았어.
전시회를 보러 온 건 아니었으니까...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머물 수 있는 ‘쉼터’ 같은 분위기,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가을의 정서를 느끼기게 딱 좋은 곳이라 생각했거든.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차도 마실 수 있는...
영자 씨와 쪼야는 대추차를 선택했고,
파파와 나는 쌍화차를 주문했어.
전통다원에서 내어주는, 몸에 좋은 재료로 우려낸 대추차는
시중 차보다 훨씬 은근하고 덜 달았어.
당뇨가 있는 영자 씨는 달콤함을 늘 경계해야 했지만,
어쩌다 오는 이 작은 기쁨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서,
영자 씨가 원하는 대로 주문해 드렸어.
'대추차에 약과.'
작은 약과를 한 입 물고 차를 홀짝이는 당신 모습,
좋아하시면서도 누가 당신의 서투름과 불편함을 눈치챌까 곁눈질하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그날의 대화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이야기였지만,
[전통다원]의 분위기 덕분에 모든 말이
오래된 수묵화처럼 은근한 색을 띠었고,
이제 막 시작한 가을바람은 우리 마음속 소음을
잠시 잊게 해 주었지.
전시장은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림 대신 차 향기를 바라보며 시간을 마셨고,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서로의 시간을 그렇게 공유하고 있었던 거야.
전시회의 어떤 그림보다 더 깊이 남는 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기분으로.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나오며,
스러져 가는 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다음에 또 오겠다 했는데...
그때도 '대추차를 마시겠다' 하셨는데...
그 후로는 이상하게 오지 못했네.
힘든 일도 아닌데... 먼 거리도 아닌데...
영자 씨,
며칠 전, 영자 씨를 기억하는 내 직장 동료 중 한 사람, Y 언니를 만나러 인사동을 다녀왔어요.
영자 씨표 수제비가 그리워서, 인사동 맛집을 찾아 항아리수제비와 해물파전을 먹고 나니,
오랜만에 커피 대신 차가 그리워졌지요.
자연스레 들르게 된 곳이 이곳, 경인미술관 속 [전통다원]이었어요.
제가 가자고 하니, Y 언니도 종종 오는 곳이라 하더군요.
저는 영자 씨와 가족모두 함께 왔던 그날 이후 처음이었어요.
생각나서, 저는 쌍화차를 주문했습니다.
“나는 대추차가 좋더라. 가격도 더 저렴하고.”
Y 언니는 영자 씨의 원픽 차를 택하더군요.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자연스럽게요.
반년 만에 만난 우리는 부지런히 사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언니의 늦은 결혼, 그녀의 어머님, 그리고 우리 정웅 씨에 대한 이야기까지.
제가 문득 물었어요.
“언니, 결혼하니 좋아? 후회는 안 해?”
“영원한 내 편이 생긴 느낌? 마음이 아주 편안해. 세상도 고요하고…”
이 언니 자랑도 조용히 하네요.
영자 씨, 언니는 정말 결혼을 잘한 것 같지요.
다음에 또 물어봐야겠어요. 같은 대답을 들을지... ㅎㅎ
오후 수업이 있는 언니는 3시에 먼저 떠났고,
나 홀로 고요히 앉아 있으려니,
영자 씨와 함께했던 그날이 오늘처럼 떠올랐습니다.
차 향과 약과의 달콤함, 영자 씨의 조심스러운 미소.
추억은 이렇게, 그때와 지금을 연결하는 작은 다리가 되어 줍니다.
언젠가 또 다른 가을, 또 다른 차 한 잔 속에서
나는 다시 이 순간을 떠올리겠지요.
Y 언니에게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흘린 기억을 담아, 영자 씨께 편지 한 통 띄웁니다.

경인미술관, 전통다원이 더 궁금하시다면 들러주세요.
[드리는 말씀]
안녕하세요.
원래 매주 목요일에 연재되는 [영자 씨, 나는 조금 천천히 갈게] 23화를 개인 사정으로 금요일에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올린 글도 편안하게 읽으시며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늘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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