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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사계절을 지나며...

by 호주아재

살다 보면, 이유 없이 가슴이 뛴다.
아무 말에도 욱하고, 아무 일도 아닌데 눈물이 고인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상해진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지만,
사실 그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야 하는 감정의 사계절이다.

처음 감정이 요동치던 건 아마 사춘기였다.
그땐 요즘처럼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감정이란 걸 글로 검색해 볼 수도 없었고,
마음이 울컥해도 그게 뭔지 몰라 그냥 지나갔다.
혼자 방 안에서 조용히 뒤척이던 밤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그 혼란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2병.
요즘 아이들은 그 시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밈처럼 소비도 하지만,
나는 그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을 살았다.
그저 내 안에 무언가 뜨겁게 부글거리고 있었고,
세상이 날 오해한다고 믿었고,
어쩐지 모두가 밉고, 또 나 자신도 싫었던 시절.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때의 나 역시, 딱 ‘중2병’이었구나 싶어 피식 웃게 된다.

권태기라는 단어도
정확히 언제였는지조차 모른다.
아마 호주에 와서 영주권, 시민권을 준비하며
나만의 싸움 속에서 버텨내던 그 시절,
무언가에 지쳐 있었지만,
권태라는 말조차도 내 사전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목표는 눈앞에 있었으며,
멈추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나를 끌고 갔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무뎌져도,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어느새 또 다른 하루를 살아냈다.

그렇게 긴 시간...
나도 모르게 많은 계절을 지나왔고
어느덧 나는,
호주에서 꽤 유명한 한국인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셰프들과 함께 일하고,
레스토랑에서 내 이름을 말해주고 찾는 사람들이 생기고, 주방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경력 있는 셰프로 불릴 만큼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그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뿌듯함을 느낄 틈도 없이
무언가가 갑자기 훅 하고 들어왔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깊은 한숨,
어제까진 아무렇지 않았던 일들이
오늘은 서럽게 느껴지는,
그 이름 모를 감정의 파도.

갱년기.
이번엔 정말… 너무 세다.
전의 감정들은 어렴풋이 지나갔지만,
이번엔 다르다.
몸이 다르고, 마음도 다르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고,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이 날 것 같은 날이 많아졌다.
이전엔 견뎌내면 됐고,
버티면 되었는데,
이젠... 버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디에도 털어놓기 어려운 이 감정은
더 깊고, 더 날카롭고, 더 아프다.


갱년기 우울증이라고 진단받고, 처방약도 받아봤지만…
이상하게 약조차 내 마음을 붙들지 못했다.
약을 먹는다고 사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무기력함 위에 담요를 덮은 듯,
잠깐 덜 느껴질 뿐, 안에 있는 공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엔 감정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애써 모른 척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
지금의 나를 붙잡고 싶어서.
하루하루를 기록하다 보면,
혼란도 조금은 정리되고,
슬픔도 어디론가 흘러가고,
마음에 작은 온기가 남는다.

글을 쓰면, 내가 나를 들여다볼 수 있다.
세상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이 글만큼은 내 속도로 쓸 수 있으니까.

나는 이제,
이 갱년기의 한가운데서
내 인생의 또 다른 사계를 쓰고 있다.
감정을 견디는 대신,
감정을 껴안고, 이해하고, 기록하며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다.

이 계절이 지나고 나면
어쩌면 나는 더 깊은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더 넓게 이해하고, 더 조용히 공감하는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오늘도 한 줄을 쓴다.

그리고 믿는다.
이 글들이,
내가 다시 피어나는 봄의 시작이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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