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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한 인간 (통합본)

누구를 노멀하다고 할 수 있을까

by 서안 Mar 28. 2025

나는 그저 노멀한 인간이다. 


키는 177cm, 몸무게 67kg, 연애 경험 1회, 만 28세.

특별한 성공도 없고, 대단한 업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잊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동기부여 영상이나 철학적인 강연보다도

나 자신을 찾는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이 글을 따라 읽는 독자에게도 조금이나마 울림이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프롤로그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닮고 싶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끌린다. 나 역시 그랬고, 많은 이들이 그런 책을 펼친다. 하지만 읽을수록 그들과 다른 나 자신에게 과연 그들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알기 전에, 먼저 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나를 알고 싶어 발버둥 치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의 모습, 나의 아픔, 그리고 나의 힘을 들여다보려 한다. 짧은 인생을 살아오며 느낀 것들을 글로 남겼지만, 이 기록이 앞으로의 긴 여정을 더 지혜롭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도 작은 울림이 되기를 소망한다.



1

집에 불을  꼬맹이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우리 동네에는 작은 슈퍼 하나 없었다. 대신 조금만 걸어가면 고속도로와 연결된 휴게소가 있었다.

시골에서 한 걸음만 나아가면, 갑자기 쏜살같이 달리는 차들이 보이는 그 공간. 어린 나에게는 마치 마법 같은 곳이었다.


나는 도전과 모험을 좋아했다.

하수구를 탐험하기도 하고, 놀이터 모래밭에 내 옷을 묻어두고 다음 날 다시 가서 찾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고도 많았다.

   •   세발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경사에서 내려가다 경운기에 부딪혀 기절하기

   •   지붕 위에서 셔틀콕을 빼다가 팔 부러지기

   •   놀이터에서 놀다가 머리가 찢어져 병원 가기 (2회)

   •   할아버지 자전거를 몰래 타고 읍내까지 가기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 사건은 따로 있다.


어느 날, 친구와 단둘이 집에 있을 때였다.

우리는 안방에서 라이터와 휴지를 가지고 놀았다. 휴지에 불을 붙이고 바닥에 내려놓으니, 장판 위로 작은 분화구 같은 문양이 생겼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다음 기억은 없다.


이웃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집에 볼일이 있어 들어왔다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나가려 했는데

안방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문을 열자마자 연기가 확 나왔고, 나는 친구와 함께 냅다 도망쳤다고 한다.


만약 그 아주머니가 아니었다면, 우리 집 자리에는 정말 ‘큰 분화구’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놀랍겠지만, 나는 그때 7살이었다.


어릴 때 나는 몸으로 부딪히며 세상을 배웠다.

아픈 경험이 많았던 덕분인지, 이후로는 더 신중한 사람이 되었다.

다치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놀이기구도 잘 안 탔다.


그런데 지금 곧 서른을 앞둔 나는, 더 이상 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다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이 아픔마저도 나에게 엄청난 경험이 될 것이고


다시는 같은 상처를 반복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2

꼬봉의 꿈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선수를 꿈꿨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운동을 배웠고, 나는 내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스카우트를 받아 팀에 들어갔지만, 그곳에 있는 친구들도 대부분 스카우트된 아이들이었다.

나보다 더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부러웠던 건

키도, 덩치도, 스피드도 아닌 부모님의 서포트였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사기를 당했고,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보겠다며 도전을 떠났다.

어머니는 홀로 보험 일을 하시며 나와 누나를 키웠다.


당연히 축구부 회비는 밀려갔고, 경기가 있어도 부모님이 오실 수 없었다.


나는 경기에서 지면 엉덩이가 파래지도록 맞았고, 싸대기를 맞아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회비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혹시나 감독님과 코치님이 나를 미워할까, 친구들 입에서 회비 이야기가 나올까 마음을 졸였다.


친구들끼리 집 평수 이야기를 할 때면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하거나, 누군가 집요하게 묻기라도 하면

“아, 난 그런 거 잘 몰라.” 하고 얼버무렸다.


감독님은 나를 ‘꼬봉’이라고 불렀다.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도 있었는데, 우리 둘을 그렇게 불렀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내가 가난해서 무시당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경험이 나에게 엄청난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과 기숙사 생활을 하며 눈치 보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나는 지금 누구보다도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어릴 때 받았던 무시와 상처는, 현재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된 나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꿈.

한없이 아름답게 상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무서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절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꿈을 그냥 ‘자면서 꾸는 꿈’으로 끝내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다는 것이다.


절망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꿈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내디뎌 본 사람만이, 절망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절망은

자신이 생각한 꿈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계속 도전하고, 계속 절망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롤러코스터


나는 놀이기구를 못 탄다.

아니, 확실히 말하면 믿지 못한다.


추락하면 어떡하지?

기계가 갑자기 멈추면?

머릿속에서 불안한 생각들이 떠나질 않는다.


내 고등학교 시절도 그랬다.

축구를 해오던 나는 고3이 되었고,

예체능도 결국은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이 시기에 인생이 좌지우지된다고 믿었다.


“나는 상품이다.”

그렇다면 결함이 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불안했다.

불량품이 될까 봐.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나는 좋은 대학에 갈 기회가 많았다.

팀의 주장을 맡고 있었고,

감독님도 나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그래서 기대했다.

“좋은 길이 열릴 거야.”


그런데, 첫 대회를 앞두고

동계훈련 도중 발등 부상을 당했다.


첫 대회를 그대로 날려버렸다.

정신적으로 무너졌지만,

두 번째 대회가 남아 있으니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대회 한 달 전

이번엔 쇄골뼈가 세 조각이 나면서 시즌 아웃.


상승하던 기대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앞이 캄캄했다.


11월,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복귀했다.

하지만 이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시험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가 남은 축구부 T.O를 잡는 것.”


그런데 내 머릿속엔 온통 의심뿐이었다.

내가 과연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시 내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축구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 롤러코스터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까?

아니면 내려야 할까?


그때, 감독님이 나를 불렀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테스트를 볼 생각 있냐?”


해외 에이전트를 소개해 줄 테니

동계 시즌 동안 몸을 만들어

프로 테스트를 봐보자는 제안.


나는 다시 한번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그동안 해왔던 동계 시즌보다

두 배는 더 미친 듯이 훈련했다.


그리고 1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상승하듯,

내 기대감도 함께 올라갔다.


“이제 모든 게 잘 풀릴 거야.”


도착 후, 에이전트를 만났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열심히 해서 알아서 살아남아 봐라.”


매정해 보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특별한 유망주도 아니었고,

감독님의 추천으로 온 평범한 선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한 달간의 테스트.

나는 그곳에서 모든 걸 불태웠다.


그리고, 결과는.


매 경기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팀원들의 기대치가 치솟았다.

감독이 나를 불렀다.


“등번호를 정해라.”


팀 내 현지인 주장을 제외하고

첫 번째로 고를 기회.


평소엔 번호 욕심이 없었지만,

그때 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10번이요.”


이 팀을 살릴 사람은 나라고 믿었다.

팀원들도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처음이었다.

내가 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진 게.


이 롤러코스터는 이제

우주로 향하는 줄 알았다.


시즌 첫 경기.

2:3 패배.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내 플레이는 기대 이하였다.


“괜찮아. 다음 경기부터 다시 하면 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를 앞둔 어느 날.

팀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감독이 바뀐다.”


어이없었다.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두 번째 경기.

이상했다.


뭔가에 홀린 듯,

내 실력의 30%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 놈 빼라!”

“저 선수가 왜 뛰는 거야?”


언어를 몰라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비난이다.

아니, 그보다는 조롱에 가까웠다.


그 작은 소리 하나까지

모조리 내게 꽂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교체 사인을 보냈다.


“나 좀 빼주세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교체 요청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 롤러코스터에서 내리려 하고 있다.


이후 반 시즌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핀 제거 수술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수술을 마친 뒤 에이전트와 통화한 끝에 결국 축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긴 여정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와 잠시 쉬기로 했다.


우리는 때때로 오랫동안 해왔던 일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나 역시 그게 가장 힘들었다.

10년 동안 매일같이 운동을 해왔고, 내게 주어진 삶의 리듬은 너무나 당연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동하고, 일요일은 쉬는 날.

그게 내 삶의 전부였고, 그래서 더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면?”

“이제 와서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고 해도, 또 10년을 투자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열심히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답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미 10년을 온전히 쏟아부은 사람이었다.

그만큼 해봤으니, 다른 것도 못할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자, 새로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롤러코스터를 타볼 준비를 하고 있다.



4

빛나는 조명


나는 한때,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뛰던 축구 선수였다.

하지만 조명이 꺼지자,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스무 살, 처음으로 다양한 빛이 있는 밤거리를 떠돌며 방황했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내 이야기를 술안주 삼았다.

“야, 내가 축구 그만두고 나니까….”

그렇게 앞날을 고민하기보단, 그 순간을 잊으려고 마셨다.

한 달 만에 6kg이 쪘다.


아침이 되면, 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늦잠은 자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서 무의미하게 하루를 흘려보냈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베란다 앞에 섰다.

그저 밖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지나가던 누나가 한마디 던졌다.


“왜, 거기서 뛰어내리게?”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는데, 남들이 보기엔… 그런 상황으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순간 온몸이 오싹해졌다.

이러다간 정말 내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날을 정해야 한다.”

나는 그제야 결심했다.


누나는 항상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집이 어려워 학원을 한 번도 다니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좋은 대학에 갔다.

법학과에 입학할 정도로 내신도 뛰어났다.

그래서 나는 누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누나, 나 뭘 해야 할까?”


누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축구 말고, 네가 좋아했던 거. 잘했던 거. 그거부터 생각해 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잖아. 그리고 저번에 뮤지컬 배우 멋있다고 하지 않았냐?”


순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TV에서 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뮤지컬 배우에게 매료된 적이 있었다.

배우들은 어떤 직업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 자신만의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야, 너 노래 좀 하는데?”

친구들이 내 노래를 듣고 한 마디씩 했었다.

그게 감독님 귀에 들어갔고, 결국 나는 축제 때 노래 대회에 참가했다.

참가자는 많지 않았지만, 우승을 했었다.


그렇게 나는 뮤지컬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6개월 만에, 마치 꺼져 있던 방 안의 조명이 조금은 켜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민 끝에, 고등학교 때부터 가깝게 지냈던 진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은 성악을 전공하셨기에 이쪽 분야를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대학에 가는 게 어떠니?”


나는 순간 멈칫했다.

대학? 축구만 했던 내가?


내가 10년을 축구에 바쳤듯, 그들도 수년간 연습했을 텐데…

내가 그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때 친척 형이 떠올랐다.

연기학과를 나온 형은 평소에도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가면을 쓰는 듯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내가 “연기 한 번 보여달라”라고 했을 때, 형은 곧바로 몰입해서 연기를 펼쳤다.

그때는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과연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불가능할 것 같다는 결론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형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극·뮤지컬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치열한 세계야.”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막막해졌다.


며칠 뒤, 베트남에 있던 친척 형이 한국에 왔다.

첫째 고모의 아들로, 아버지와 친했던 형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아빠, 형과 함께 술자리에 앉았다.


형은 과거, 외국에서 내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도와줬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부모님 생각은 해봤어?”

“프로까지 갔는데, 이제 좀 빛을 볼 시기에 노래를 한다고?”

“배우? 네 친척 형도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데도 힘든데, 네가 가능하겠어?”


쓴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옆에서 아버지는 술만 들이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미친 건가?’

‘부모님이 허무할 수도 있겠다….’


아버지는 핸드폰 배경화면을 내 프로 데뷔 경기 사진으로 해두셨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현수막까지 걸며 홍보하셨다.

나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알겠다”라고만 하셨기에, 괜찮을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은 정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길을 가야 하나.”

“그리고 최대한 집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그렇게, 내 방의 불은 다시 꺼져갔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누나는 내게 말했다.


“곧 대학 수시 원서 넣는 날이야.”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누나가 물었다.

“안 갈 거야?”


나는 친척 형이 했던 말,

그리고 내가 했던 고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 순간, 누나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형이 하라면 하고, 말라면 안 할 거면, 네 인생 그 형이 살아줄 거야?”

“부모님 걱정을 왜 네가 해?”

“그렇게 걱정할 거면 축구는 왜 계속했냐?”

“끝까지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네 인생을 살아.”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래.

한 번 사는 내 인생이다.

남을 걱정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 짧다.


하고 싶은 거 하자.


그렇게 나는 대학교 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 가능성이 있는 대학을 찾아야 했다.

2. 입시 조건을 분석해야 했다.

3. 나에게 맞는 준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뮤지컬 관련 대학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은 연기·노래·무용·특기를 기본적으로 요구했다.

더 수준이 높은 곳은 **시창(악보만 보고 부르는 시험)**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단 한 달.


그 안에 가장 빠르게 늘 수 있는 건 ‘노래’였다.

그래서 노래 시험만 보는 학교 두 곳을 골라 원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다시 진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한 달만 도와주세요.”


선생님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코인노래방에서 MR을 다운로드하여 하루 3시간씩 연습했다.

주말마다 선생님께 체크를 받으며 피드백을 받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입시 날이 다가왔다. 


입시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나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클락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목을 풀었다. 그래서였을까? 입시장으로 가는 길은 뻥 뚫린 것처럼 느껴졌고, 1시간이 걸리는 거리도 체감상 20분도 채 안 된 것 같았다.


대기장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마술책을 들고 온 친구, 드레스를 차려입은 친구, 심지어 쫄쫄이를 입고 온 친구까지. 순간 충격이 몰려왔다. 이게 뮤지컬의 세계인가? 평범해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점점 빨리 뛰었다. 연습실로 안내받아 들어갔는데, 다른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신발장 앞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하던 목 푸는 방식이 맞는 걸까? 사람들이 비웃지는 않을까?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때, 안내원이 나를 힐끔 보더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왜 몸을 안 푸세요?”


나는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아… 다 풀고 와서 괜찮아요.”


혹시 건방진 대답이었을까?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안내원은 감탄하듯 말했다.

“와, 실력이 확실하신가 보네요.”


사실,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엄마 손을 잡고 태권도장에 처음 들어선 8살 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오히려 빨리 내 차례가 오기를 바랐다. 이 낯선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드디어 내 번호가 호명되었다. 조명이 나를 비추었고, 정면에는 연륜이 묻어나는 네 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었다. 순간 떠오른 말이 있었다.

“넌 평가받는 게 아니다. 너를 보여주는 거다.”


같은 멋진 말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내 머릿속을 스친 건 다른 조언이었다.

“심사위원들을 감자라고 생각해. 얼마나 귀엽니?”


순간 긴장이 풀렸다. 그렇게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큰 실수 없이 시험을 마쳤다.


시험장을 나서 집으로 향하는 길,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축구를 시작하고, 그만두고,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여기까지 온 내가 정말 맞는 걸까?

내 선택이 옳은 걸까? 잘할 수 있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돌아오는 길은 체감상 2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까  나는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나는 합격을 원했고,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해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해내는 것. 그것이 내 전문 아니었던가?


그렇게 나는 또 다른 빛을 받아보기로 했다.


지금 돌아보면, 인생에 정답은 없었다.


축구를 하던 시절,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뮤지컬을 하던 시절, 내가 다시 축구 지도자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어쩌면 인생은 하나의 직선이 아니라, 수많은 끈들이 여기저기 걸리며 연결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어떤 길은 다음 여정으로 이어지고, 어떤 길은 다시 돌아오지만, 그것이 두 줄이 되어 더욱 단단해질 수도 있다.


결국, 모든 순간은 다음을 위한 과정이었고, 나는 그렇게 또 다른 무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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