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정들었던 동네를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갔다.
친한 친구들과의 헤어짐에 한동안 울적하기도 했지만 새롭고 낯선 환경에 금방 적응해 갔고, 새로운 학교에서는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유로 J와 친해졌다. 우리는 생각보다 공통점도 많고 관심사도 비슷해서 급격하게 친해졌다.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디든 붙어 다녔는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J의 친구 H였다.
H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J와 친해서 늘 등하교를 같이 했었는데, 내가 J와 친해지고 나서부터는 셋이서 등하굣길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숫기가 너무너무 없었던 J가 나와 H를 서로 소개해주지 않아, 통성명을 하지 못한 채로 같이 다니게 된 거다. 마찬가지로 숫기가 없던 H는 이 상황에 아무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미숙하고 어렸던 나도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늦게라도 통성명을 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됐을 텐데, 당시의 우리는 그게 어렵게 느껴져서 서로 알지만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그렇게 우리는 J를 가운데에 두고 서로 건너 건너 이야기를 하며 등하굣길을 함께 했다.
나는 내심 H와 너무너무 친해지고 싶었다.
그 애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다 갖고 있었는데, 공부도 잘하고, 글씨도 정갈하고 예쁘게 썼으며, 다정하고, 사랑받고 자라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느껴졌다.
말하자면 '이상형 친구' 그 자체였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매일 기회를 엿봤지만 말 붙일 기회(용기)가 잘 오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며 1학년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2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운명처럼 같은 반, 옆자리가 되었다. 너무 기뻐서 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를 건넨 기억이 난다.
"H야! 안녕! 필통 진짜 귀엽다, 어디서 샀어?"
이 이상하고 어색한 한 마디의 말로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H는 도서부원으로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1시간가량 부원활동을 했다. 나와 J는 H의 부활동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도서관 한편에서 책을 읽고는 했는데, 그 시간이 지루하기는커녕 너무 재밌었다.
옛날 학교 특유의 나무 책장 냄새, 책에서 나던 종이 냄새, 오후의 나른한 햇살과 약간은 졸린듯한 느낌, H의 부활동이 끝나면 함께 수다 떨며 놀 수 있을 거라는 설렘, 담당 선생님 몰래 도서관 구석에서 수다를 떨며 과자를 먹었던 일,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H의 권력(!)을 사용해 가장 먼저 대출했던 일, 도서관 한 구석을 우리의 아지트처럼 사용했던 일 등.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그 시절의 우리로 가득 채워졌다.
도서관에서의 추억이 행복해서일까?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성인이 된 뒤로도 꾸준히 독서하는 어른이 된 나는, 가끔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서 읽고는 한다.
지금 사는 곳이 신도시여서 그런가 깨끗하고 밝고 정제된 느낌의 도서관이 많은 편으로, 내가 생각하는 '도서관' 특유의 그 느낌은 아니지만 깨끗한 시설에 만족하면서 이용하고 있다.
하루는 읽고 싶은 책이 동네에 없어서 옆동네 도서관에 간 일이 있다. 그 도서관은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으로, 규모가 큰 만큼 오래되고 시설이 조금 낙후되어 있었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훅- 하고 도서관 특유의 나무 냄새와 책냄새가 내 코끝을 간질였다.
그 냄새를 맡자마자 나는 중학교 시절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삶을 살아가느라 덮어뒀던 그 시절의 한 페이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히 기억났다.
그날은 H와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H와 나는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다.
우리는 아주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늘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고 자주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가끔 이렇게 우연치 않은 기회로 우리의 풋풋했던 시절을 만나게 될 때마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서로가 있음에 감사한다.
지금,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H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