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내릴 때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을 좋아한다.
약간은 씁쓸한 그 향이 잠에서 덜 깬 정신을 서서히 깨워주는 게 좋다.
바쁜 하루를 시작하기에도, 여유로운 주말을 맞이하기에도 좋다.
20대 후반에 다녔던 회사에는 드립커피머신이 있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지라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는 직원을 보면서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커피를 내리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출근하면 온 사무실에 은은하게 퍼지던 커피 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던 순간들,
점심마다 다 같이 소파에 누워 잠을 자거나 산책을 했던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사무실을 가득 채운 커피 향도 좋아지기 시작한 것 같다.
커피 향이 좋아진 후, 카페에 가는 것도 좋아하게 됐다.
집 근처에 카페거리가 조성되어 있어서 주말마다 도장 깨기 하듯 새로운 카페를 찾아다녔다.
카페에 가득 찬 원두향과 따사로운 햇빛 아래에서 즐기는 한낮의 여유란.
그 만한 행복이 또 있을까?
그러다 어느 날 코로나가 시작됐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택도 같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너무너무 좋았는데,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답답하고 힘이 들었다.
답답함을 해결하고자 내가 좋아하던 것을 하나 둘 사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커피머신이었다.
드립커피는 손이 많이 갈 것 같아서 캡슐커피를 샀다.
세상에.. 맛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편리하지만 내가 원하던 맛도, 내가 좋아하던 향도 나지 않아서 실망이 매우 컸다.
캡슐커피머신을 팔고 드립커피머신을 살 것인가 말까를 고민하던 중 발견해 버렸다.
모카포트를.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나만의 작은 커피메이커.
이탈리아에서는 누구나 사용한다는 모카포트.
거기에 모카포트 특유의 쇠맛 나는 디자인과 각진 표면,
작고 귀여우면서도 직선적인 디자인이 살아있는 모습에 반해버렸다.
'저건 당장 사야 해!'
갖고 있던 캡슐커피머신을 팔아버리고 바로 모카포트를 구매했다.
모카포트를 사고 나서 한동안 집에는 커피 향이 가득했다.
4샷이 나오는 모카포트를 구매해서 아침, 저녁으로 커피를 마셨다.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커피 향을 온 집안 가득 퍼트리는 이 작은 주전자가 어찌나 예쁘던지!
코로나 시기 내내 열심히 커피를 내려마셨다.
코로나가 끝나고, 이직을 하고, 주말마다 일정이 생기는 등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자
자연스럽게 모카포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어느 순간 잊고 지냈다.
하루는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가 집에 놀러 온다길래 오랜만에 모카포트를 꺼내 들었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집안 가득 퍼지는 커피 향에 만족해하며 커피를 한 입 맛보는 순간
퉤- 하고 뱉어버렸다.
모카포트도 관리를 해줘야 하는데, 관리 미흡으로 안에 있는 고무링이 삭아 버린 것이다.
그 맛없는 커피를 대접할 수 없어 부랴부랴 집 앞 카페에 다녀와야 했다.
그 뒤로 모카포트는 주방 한편을 차지하는 예쁜 인테리어 아이템이 되었다.
고무링만 갈아 끼우면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데,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여태껏 방치해 뒀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다시 모카포트를 꺼내보려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않았던 나 자신도, 커피 한 잔 마시며 돌봐야지.
집안 곳곳을 커피 향으로 가득 채우고 여유로운 하루를 만끽해보기로 나 혼자만의 약속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