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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인권 평화 백일장 시상식 후기

노근리 평화공원.

by 서도운

4월의 그 날에 찍은 애기똥풀입니다.


올해 4월, 작가의 꿈을 키우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까지 병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마음이 조금 편안하고 가벼웠습니다. 날씨도 유난히 맑고 햇빛이 따뜻해서 기분이 괜찮았던 날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충북 영동군은 어렸을 때부터 노근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란 곳입니다. 학교에서 배우기 전부터, 동네 어른들 이야기 속에서 먼저 접했던 이름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지는 장소였습니다.

그날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문득 노근리 평화공원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날씨도 좋고 바람도 시원해서, 오랜만에 들러보자고 자연스럽게 의견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노근리 평화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사진만봐도 그 날이 얼마나 화창하고 맑았는지 느껴지시겠지요?


노근리 사건을 알고 계신 분들도 있고,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6·25전쟁이라는 큰 비극 속에서 또다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우리 지역에서는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핵심만 말씀드리면, 전쟁 상황에서 아무런 무기도 없던 민간인들이 오해와 공포 속에서 희생된 사건입니다.

지역에 살다 보니 이름은 익숙하지만, 막상 그 현장을 직접 찾아가면 당시의 무게가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알고,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조금만 설명드리면, 북한군은 서울을 불과 3일 만에 점령하고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던 때였습니다. 전황이 워낙 급박하다 보니 미군과 아군 모두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였죠.

그때 영동인근인 충청북도 옥천 부근에서 북한군이 피란민으로 위장해 미군 한 사단을 거의 괴멸시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950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미군은 피란민 속에 적군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공포와 불신을 크게 갖게 되었고, 그 불안이 결국 노근리 사건으로 이어지는 배경 중 하나가 됩니다.

미군은 원래 피란민을 대피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옥천에서의 위장 사건 이후, 지휘부 전체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빠져 있던 때였습니다. 전황은 혼란스러웠고, 어디에 적이 숨어 있는지도 알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 될 끔찍한 결정이 내려집니다.
당시 황간 임계리와 주곡리 부근에서 이동하던 피란민들을 철길 주변으로 모이게 한 뒤, 피란민 대열을 향해 폭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무장도 없고 도망치던 민간인들이 하루아침에 ‘의심 대상’이 되면서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죠.

폭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피란민들은 미군의 총검 위협에 쫓겨 근처에 있던 노근리 쌍굴다리 안으로 몰리게 됩니다. 그곳은 그저 지나가는 철도 아래의 작은 터널이었지만, 피란민들에게는 도망칠 곳도 없이 갇힌 공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유도 모른 채 쌍굴다리 안으로 들어간 수백 명의 피란민들은, 한여름의 무더운 7월에 3박 4일 동안 어둡고 축축한 콘크리트 공간에서 고립된 채 참혹한 상황을 맞습니다. 굴 바깥에서는 기관총을 든 미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고, 결국 많은 민간인들이 그 안에서 학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더 안타까운 점은, 당시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부녀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젊고 힘 있는 청년들은 이미 징집되었거나, 전쟁 초기 혼란 속에서 앞서 피란을 떠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이동이 늦고 힘이 약한 사람들만 피란길에 남게 되었고, 그들이 그대로 비극의 중심에 서게 된 셈입니다.

그날 대략 공식적으로 인정된것만 최소 163명의 사망 혹은 실종이었고 추정치로는 400여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6·25전쟁이 휴전된 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 조용히 묻혀 있었습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를 생각하면, 아군과 연합군의 실수나 비극을 공론화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한미관계를 고려해야 했고,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공식적으로 다루기에는 여러 현실적인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근리 사건은 피해자들의 가슴 속에서만 오랫동안 기억되고, 사회적으로는 말하기 어려운 침묵의 역사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희생자 유족들은 그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지역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던 목소리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1999년 AP통신에서 노근리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외에서 큰 관심과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비극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와 ‘기억해야 할 역사’로 자리 잡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진상규명 요구가 계속되면서 미국도 결국 사건에 대한 부분적 책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4년에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노근리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기념 사업이 가능해졌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2011년, 약 1,700만 달러 규모의 정부 기금이 투입되어 지금의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비극이 뒤늦게나마 역사로 기록되고, 기억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따뜻하고 맑던 4월의 공기도 쌍굴 앞에 서니 한순간에 무거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굴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자 공기가 확 달라졌고, 이유 없이 서늘하고 울적한 기운이 밀려오더군요. 안에서 작은 소리를 내면 메아리가 여러 번 울려 퍼졌는데, 그 울림이 괜히 더 마음을 쿵 하고 내려앉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답답했을까.
도망칠 곳도 없이 갇혀 있던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염원이 이 공간에 남아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간 자체가 담고 있는 감정의 잔향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표시들도 설명을 조금 덧붙이면,
동그라미 표시가 된 부분은 총알이 지나가며 남긴 자국이고,
세모 표시가 된 곳은 총알이 실제로 박혀 있는 흔적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니, 단순한 표시가 아니라 그 순간을 그대로 증명하는 기록처럼 느껴졌습니다.

동그랗게 아직 흉터로 남은 총알들이 보이시나요?

참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현장은 이렇게 무겁고 슬프고 아픈데, 그날의 날씨는 또 지독할 만큼 맑고 화창했습니다.
눈앞 풍경과 마음속 느낌이 너무 달라서, 잠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쌍굴을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추모탑 앞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깊게 묵념을 드렸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감정이 뒤섞여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날 느낀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시 한 편으로 옮겨 적었었습니다.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장면들과 그 분위기가 자꾸 떠올라서, 기록하지 않고 지나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써두었던 시를 시간이 조금 흐른 7월, 노근리 평화·인권 백일장에 한번 제출해 보았습니다.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날의 감정을 담아 쓴 글이기에 의미 있게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1월이 된 지금, 그 시가 입상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생각보다 더 큰 결과라 놀랍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날 느꼈던 마음을 누군가 함께 읽어주었다는 점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입상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특히 올해 수상자 10명 가운데 영동 출신이 저 혼자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지역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상 소식을 받고 다시 찾은 쌍굴은, 4월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바람도 불고 흐리고 훨씬 추운 11월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4월처럼 서늘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처럼 막막함이나 안타까움보다는 오히려 뭉클함이 먼저 올라오더군요.


감각과 감정은 늘 주관적이고, 상황과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고들 하지만
그날만큼은 제가 그렇게 느끼고 싶었습니다.
마치 그날 스러져간 사람들의 기억을,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제가 이어받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요.

근현대사에는 아프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정말 많습니다.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처럼 나라의 큰 흐름을 바꾼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극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 노근리 학살 사건,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사건처럼 상대적으로 잊히거나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일들이 존재합니다.
제가 지금 나열한 사건들 외에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고, 우리가 모르는 이름 없는 희생도 셀 수 없이 많겠지요.

모를 수는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역사를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한 번이라도 마주하고, 한 번이라도 마음에 닿았다면 그 이후에는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공포 속에서 울부짖으며 남긴 메아리에
우리가 응답해주고 기록해주는 것,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태도가 아닐까…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제 인생에 깊은 흔적과 영감을 남긴 노근리 평화공원 방문기와
백일장 시상식 후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주제가 다소 무겁기는 했지만, 제가 느낀 감정과 생각이 조금이나마 온전히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지만,
가끔은 이렇게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분들을 떠올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시라도 그들을 기억하는 마음이 모이면,
그 자체로 작은 위로가 되고 더 나은 시대를 만들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 삶과 글 속에서 느낀 것들을 꾸준히 나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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