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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조종하는 자들

가스라이팅, 선동, 신념의 기술

by 서도운

조종자는 흔하다, 그러나 히틀러는 달랐다


우리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일상처럼 쓴다. 연인을 조종하는 사람, 가족을 속이는 사이비 교주, 논리를 무너뜨리고 감정을 파고드는 사기꾼들. 이들은 모두 타인을 도구처럼 활용하는 조종자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2번 유형'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달랐다. 그는 사람을 도구로 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도구라고 믿었다. 독일 민족을 구할 사명, 신의 의지를 실현할 존재, 정의의 전사라는 자기 확신 속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는 스스로의 조종을 ‘선한 일’이라 믿은 자였고,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다.


히틀러는 ‘이해받지 못한 괴물’이 아니라, 너무 늦게 인식된 조종자였다.

우리가 그의 조종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수백만의 생명이 스러지고 난 뒤였다.


조종자 유형 분류 – 1번 vs 2번


2번 유형은 계산적이고 도구적이다. 그들은 철저히 이득을 위해 타인을 조종한다. 감정, 죄책감, 충성심은 그들의 도구일 뿐이다. 사이비 교주, 다단계 사기꾼, 연인을 조종하는 가해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대체로 공감 능력이 없거나 극도로 억제되어 있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쉽게 조종하고 쉽게 들킨다.


특히 2번 유형의 조종자는 항상 명확한 목적을 가진다. 돈, 권력, 성욕 같은 동물적인 욕망이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신앙을 빌미로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성적인 지배를 일삼는다. 연인을 통제하는 가스라이팅 범죄자들은 피해자의 경제력을 착취하거나, 성적 종속을 강요한다. 사기범죄의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감정적 신뢰를 유도해 투자금을 빼앗거나, 연애와 결혼을 미끼로 금전과 육체를 동시에 탐한다.


그들은 계산적으로 접근하고, 피해자의 인간적 약점을 이용한다. 그리고 끝에는 늘 돈과 성이 따라온다. 그들의 조종은 수단이고, 목적은 언제나 탐욕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들은 공감 억제(Empathy Suppression), 도덕적 정당화(Moral Disengagement), 행위-피해 분리(Cognitive Distancing) 등의 특성을 보인다. 흔하고 익숙한 조종자다.


1번 유형은 드물다. 하지만 훨씬 더 위험하다. 이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조종을 ‘선동’이 아니라 ‘사명 수행’으로 여긴다. 자신의 행위가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믿기에, 조종에도 죄책감이 없다.


히틀러는 그 전형이다. 그는 유대인을 악으로 규정했고,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해 세계를 조작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을 구원자로 확신했다. 그 확신은 이념적 자기 확신(ideological certainty), 도덕적 면책(moral licensing), 구조적 거리두기(structural dissociation)로 구성된다.


2번 유형은 보통 가까운 지인, 연인, 가족, 친구 등 신뢰를 바탕으로 접근한다. 피해자는 그들과 정서적 유대를 느끼고 있었기에 더 쉽게 조종당한다. 또는 심리적·지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 등 자존감이 약화된 이들을 타깃으로 삼아, 공감과 위로를 가장한 접근으로 마음의 틈을 파고든다. 이 조종은 일상적 관계 안에서 은밀하게 퍼지고, 그만큼 피해자는 조종을 '애정'이나 '보호'로 착각하기 쉽다.


반면 1번 유형은 다르다.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제3자, 심지어 수백만 명의 군중까지도 조종한다. 그들의 언어는 구원과 정의, 이상과 미래를 말하고, 사람들은 그 신념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관계가 없어도 조종이 가능하고, 오히려 그 익명성과 집단성이 대규모 동조를 더욱 촉진시킨다. 그들은 구조를 바꾸고, 언어를 지배하며,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중심엔 흔히 ‘위대한 대의’라는 이름이 있다.


히틀러의 특이점 – 흔하지 않은 1번의 결정판


히틀러는 흔한 조종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는 금욕적이었고, 사치스럽지 않았으며, 성욕을 권력의 도구로 삼지도 않았다.

에바 브라운과의 관계는 감추어졌고, 대중 앞에서 그는 언제나 이념에 헌신하는 전사처럼 행동했다.

그는 쾌락이 아니라 '사명'으로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거리두기’ 전략이다.

히틀러는 수많은 죽음을 결정했지만, 단 한 번도 직접 그 현장을 방문하지 않았다.

유대인 수용소, 집단 총살, 전선의 지옥 속에서 그는 늘 몇 단계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그는 단 한 사람도 직접 살해하지 않았지만, 그의 명령은 수백만을 지웠다.


그는 피해자의 얼굴을 보지 않음으로써 죄책감과 무관한 위치에 서 있었다.

결국 그가 끝까지 믿은 건 자신의 '정의로움'이었다.

죽음조차 직접 마주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자신이 선한 지도자라는 환상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이 히틀러가 1번 유형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이유다.

행동은 악마의 것이었지만, 그의 심리는 천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왜 1번이 드문가 – 그러나 왜 그들이 가장 위험한가


대부분의 조종자는 인간적인 약점을 갖는다.

그들은 욕망에 지배당하고, 본능에 끌리며, 조작의 실마리를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자주 마주치고, 비교적 쉽게 구별해낸다.


이런 ‘2번 유형 조종자’는 흔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속이고 이용할 때, 그 대상의 감정이나 고통을 상상할 필요가 없다.

죄책감은 결핍되어 있고, 죄의식은 억제되어 있다.

이들은 심리적으로 ‘타자’를 제거한 상태에서 조종을 수행한다.


하지만 1번 유형은 다르다.

이들은 공감할 수 있다. 오히려, 피해자가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조종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더 큰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1번 유형 조종자에게는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고통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사상적 정당화.”


이들은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믿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악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논리가 필요하다.

이 논리는 종교일 수도 있고, 민족주의일 수도 있으며, 철학이나 이상향일 수도 있다.


히틀러에게는 그것이 ‘게르만 민족의 부흥’이었고,

일부 사이비 교주에게는 그것이 ‘영적 정화’였으며,

극단적 이념가에게는 그것이 ‘역사의 진보’다.


1번 유형은 드물지만, 강력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스스로 선이라 믿으며,

그 믿음을 위해 사람들을 고통 속에 밀어넣는다.


히틀러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 시대가 만든 변혁적 조종자


히틀러는 괴물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의 시대에 가장 ‘희망적으로 보인 인물’이었다.

우리가 그를 늦게 알아차린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선동가가 아니라 구원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1) 시대적 배경: 절망의 집단 심리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은 국가적 자존심을 잃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민에게 치욕이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 폭동, 정치적 혼란이 일상을 잠식했다.


공화정은 무능했고, 민심은 분열되었으며,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해결책을 원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 해결책을 가장 단순하고 강력한 언어로 말할 줄 아는 자였다.


“우리는 위대한 민족이다.”

“그들이 우리를 망쳤다.”

“나와 함께하면, 다시 위대해질 것이다.”


이 구도는 희생양 + 민족주의 + 지도자 숭배라는 3요소를 결합시켰고, 대중은 점점 이성보다 감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 변혁적 리더십의 역설


히틀러는 당시 독일에서 보기 드물게 행동하는 정치인이었다.


감정적 언어를 사용하되, 조직화 능력도 뛰어났고


군중의 심리를 파악해 정치 연설을 공연처럼 기획했고


폭력조직(SA, SS)을 통해 길거리 권력을 장악했으며


합법적으로 권력을 얻되, 비합법적으로 유지했다.


그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었다.

그 질서가 파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를 변혁가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조종자가 신념형일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속는 지점이다.


그는 광인이 아니라, 체계적인 변혁가였다.

그리고 그 변혁의 중심엔 사상과 선동, 그리고 구조적 거리두기를 결합한 ‘신념형 조종’의 기술이 있었다.


오늘날 1번 유형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 신념의 얼굴을 한 조종자들


히틀러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조종 방식은 더 이상 제복과 연설, 총검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1번 유형 조종자들은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었을 뿐이다.


1) 극단 이슬람주의 –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지배


IS와 탈레반, 알카에다와 같은 극단주의 조직은

폭력의 도구를 사용하는 동시에, 사명과 정의라는 언어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신은 이것을 원하신다.”


“우리는 진실된 신자이며, 타자는 배교자다.”


“너의 고통은 순교이며, 우리의 사명은 신의 뜻이다.”



이들은 히틀러와 같은 구조를 따른다.

피해자의 고통을 인식하지만, 그것을 ‘더 큰 정의’로 무시한다.

그들에게 폭력은 악이 아니라 성스러운 의무다.


2) 정치적 선동가 – 진영 논리로 도덕을 재구성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1번 유형 조종자는 존재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혹은 진보/보수라는 이름으로 ‘절대 선’을 자처하는 정치인들.


그들은 끊임없이 내부 적(배신자)과 외부 적(이민자, 다른 진영, 언론 등)을 만든다.


대중을 ‘우리 vs 그들’의 구도로 나누고,


양심보다 충성, 사실보다 신념을 요구한다.



이들은 종종 대중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처럼 보인다.

욕심이 없어 보이며, 고통을 감내하고, 자기 희생적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1번 유형 조종자의 전형적 외피다.


3) 기술 기반 조종 – 알고리즘과 감정의 조작


오늘날 조종은 물리적인 것도, 대중 연설도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알고리즘과 필터버블 속에서 우리는 조종당한다.


정치적 콘텐츠가 감정을 자극하도록 배치되고,


가짜 뉴스는 ‘사실처럼’ 소비되고,


플랫폼은 주의를 통제하며 정체성을 설계한다.



이러한 조종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시스템일 수 있으며,

그 시스템을 만든 이들이 1번 유형 조종자일 수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그 기술이 세계를 더 나아지게 만든다고 확신하는 이들.

그들은 의도가 선하므로 조작은 정당하다고 믿는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1번 유형 조종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등장한다:


신념의 외피를 쓰고, 복종을 요구하며, 죄책감을 제거한다.


대중에게 '믿을 수 있는 진실'을 제공하며, 그 안에서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그들은 영웅으로 등장하지만, 공동체의 언어와 윤리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어떻게 조종에 저항할 수 있는가 – 감정 절제와 이성의 윤리


조종은 언제나 감정의 틈을 타고 들어온다.

분노, 두려움, 혐오, 자존심—이 모든 감정은 조종자에게는 너무도 유용한 도구다.

그들은 당신을 화나게 만들고, 상처 입히고, 불안을 자극해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조종에 저항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윤리는

“생각하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통제하는 생각”이다.


1) 감정 절제: ‘느낀다’고 해서 옳은 건 아니다


우리는 감정이 강할수록 진실에 가깝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증명한다.

가장 감정이 격렬할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속았다.


히틀러의 연설은 이성보다 감정을 움직였다.

그를 따르던 대중은 논리가 아니라 열망에 반응했다.

그리고 그 열망은 곧 집단 광기로 바뀌었다.


진실은 감정의 세기로 판단할 수 없다.

진실은 근거와 맥락, 검증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2) 이성의 훈련: 팩트와 논리, 그리고 ‘의심’의 미덕


조종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쉽게 지배한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강하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왜 지금 이 말이 감정을 자극하지?”


“이 주장의 근거는 충분한가?”


“이건 모두를 위한 정의인가, 누군가의 논리인가?”


팩트 확인, 맥락 분석, 감정과 분리된 판단.

이것이 조종에 저항하는 시민의 무기다.


3) 조종을 뚫는 힘은 ‘의심’에서 시작된다


조종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당신도 그렇게 믿게 만들려 한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하나다.


“혹시 내가 지금 누군가의 서사 속에 갇힌 것은 아닐까?”


이 의심 하나가, 집단 광기로부터 우리를 구한다.


맺으며 – 조종자는 다시 올 것이다


조종자는 언제나 정의의 말투를 하고, 공익의 얼굴로 등장한다. 감정을 자극하고, 생각을 마비시키며, 당신을 당신의 의지로 움직이게 만든다.


히틀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약함, 사회의 불안, 이념의 맹신이 만들어낸 구조였다. 그리고 그 조건은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감정을 경계하고 생각을 훈련하는 것이다. 팩트를 묻고, 논리에 근거한 판단을 내리는 것. 공감하되, 맹신하지 않는 것.


조종자는 다시 올 것이다. 그러나 그를 먼저 알아보는 자만이, 조종당하지 않는 자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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