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질된 민주주의
1. 민주주의의 어두운 이면.
2025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형식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 본질은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
삼권분립은 더 이상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 채,
정당 권력에 종속된 인사권 체계로 전환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거대 여당의 탄생은 국회의 입법 기능을 독점할 가능성을 높였고,
행정부는 국회의 실질적 견제를 벗어나려 하고 있으며,
사법부마저도 정당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로 개편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검찰의 기소권, 경찰의 수사권,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결권까지
하나의 정치권력이 관할하는 체제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정당이 삼권을 동시에 쥐려 한다.”
물론 한 정당이
진심으로 국민을 위하고, 안보와 경제를 위한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펼친다면
그 체제는 효율성과 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그들을 견제할 수 있을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모두 한 축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언론과 교육마저 통제된다면
민주주의의 마지막 안전장치마저 사라질 수 있다.
이미 교과서 전반에는
‘반일’이라는 감정적 키워드가 중심 서사로 자리 잡았고,
성소수자 관련 담론은 사춘기 이전 교육 과정에까지 등장하며
개인의 성 가치관 형성에 국가가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헌법 속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는
삭제 또는 축소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존재하며,
중국 자본은 언론과 산업, 부동산 등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동북공정 역시 꾸준히 확장되고 있지만,
정부는 체계적인 대응보다는 침묵 혹은 방관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시대, 이 현실 속에서
국민은 어떤 선택지를 가질 수 있을까?
그 대답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는 '기억'의 문제이자, '저항의 형식'이 되었다.
2. 기계처럼 순응하는 국민
정보는 넘쳐나지만, 생각은 사라지고 있다.
수많은 통계와 이미지, 단문과 요약, 자극적인 제목이 넘쳐나는 시대에
정작 사람들은 깊이 읽고, 연결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뉴스는 ‘쇼츠’로, 담론은 ‘댓글’로, 진실은 ‘썸네일’로 축소되었다.
이제 국민은 스스로 정보를 찾기보다,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생각에 반응할 뿐이다.
읽는 힘은 약해졌고, 따르는 습관만 남았다.
민주주의란 결국 시민의 사유 위에 서는 제도다.
그러나 지금 시민은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구성하기보다,
정치 세력의 감정 코드에 맞춰 ‘좋아요’를 누르는 기계로 전락하고 있다.
“기계는 프로그램을 거부하지 않는다.
인간이 기계가 된다는 건,
스스로 생각을 중단한 순간부터다.”
한쪽은 ‘선한 감정’을 무기로 삼고,
다른 쪽은 그 감정을 ‘선동’이라 비판하며 더욱 과격해진다.
이 구조는 결국 감성 대 혐오, 선한 인상 대 거친 반감이라는 이분법을 고착화시키고,
깊은 대화와 진실한 논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그 결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단이 되고,
‘의심하는 자’는 배신자가 되며,
‘생각하는 자’는 외톨이가 된다.
3.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인간은 아니다
기술은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효율을 추구할 뿐이며,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이 빠른지를 중시한다.
하지만 정치란 본래
그 ‘속도’를 제어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브레이크였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치는 오히려
기술의 가속 페달을 밟는 손이 되었고,
윤리는 핸들조차 쥐지 못한 채 뒤에 실려 가는 수하물이 되었다.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입력된 기준대로 작동할 뿐이다.
그러나 그 기준을 만든 인간이
정파적 감정에 따라 데이터를 선별하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알고리즘을 설계할 경우—
그 기술은 곧 정치적 무기가 된다.
“중립적인 기술이란 없다.
오직, 누가 그 기술을 쓰느냐에 따라 의미는 바뀐다.”
법률을 만드는 데에도,
교육 정책을 설계하는 데에도,
여론을 형성하는 미디어에도—
기술은 깊숙이 개입해 있다.
그것은 이제 ‘보조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조건이다.
우리는 지금 기술이 주는 현실만을 경험하고 있고,
그 현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설정된 것이다.
4. 문과의 몰락, 지성의 몰락
생각은 길고, 무겁고,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그리고 권력은
빠르고, 단순하고, 효율적인 것만을 남겼다.
대학은 이윤을 따졌고,
학생은 취업률을 따졌고,
국가는 경쟁력을 따졌다.
그 결과,
철학과는 폐지되었고, 문학은 취미가 되었으며, 윤리는 교양이 되었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고민하는 학문들은
더 이상 생존 가능한 언어로 간주되지 않는다.
지성은 퇴출되었고,
그 빈자리를 감정과 이미지와 클릭 수가 채웠다.
“감정은 남았지만,
이제는 ‘소비 가능한 나쁜 감정’만 살아남았다.”
분노는 팔리고, 혐오는 클릭되고, 조롱은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생각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밀려났다.
더 큰 비극은—
그나마 살아남은 인문·사회·정치 지식인들조차
이제는 공공의 책임이 아니라,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당에 충성하고,
그들은 이념을 소유하며,
그들은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지식을 사용한다.
“지식인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유리하게 배치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공부하고,
누군가는 그들을 ‘잉여’라 부른다.
누군가는 모두를 위한 미래를 고민하고,
누군가는 그들의 말을 ‘비현실적 이상주의’라 조롱한다.
그렇게,
말이 사라지고, 말할 자도 사라진 시대.
그 속에서 지성은 조용히 죽었다.
5. 그래도 쓰는 이유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나는 혁명가도 아니다.
나는 순교자도 아니다.
나는 기록자다.
나는 자유시장을 중시하고, 강력한 안보관과 경제 성장, 기술 발전, 기업 중심의 작은 정부를 옹호한다. 동시에, 소수자의 인권과 사회적 형평, 환경과 기후의 중요성 또한 깊이 인식한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페미니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주의), 그리고 이성 없는 극단 환경운동가들이다.
그러나 이런 균형 잡힌 시각조차, 이 시대에선 이단으로 여겨진다. 진보 진영은 내가 보수적 자유시장과 안보를 강조한다고 혐오하고, 보수 진영은 내가 소수자 인권과 형평을 언급한다고 나를 물 탄 좌파로 몰아붙인다. 나는 그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한편으론 가장 현실적이며, 다른 한편으론 가장 도덕적인 방향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했다.
살기 위해 침묵하는 대신,
침묵을 의미 있게 남기기 위해.
민주주의의 위기는 선동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생각이 사라질 때 시작된다.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들 속에서,
기계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 하나.
그 기록이 이 글이다.
6. 결론 – 기계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
민주주의의 위기는
언제나 선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사라질 때 시작된다.
지금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응하고, 공유하고, 조롱하고, 분노하지만
그것이 곧 ‘생각’은 아니다.
정보의 시대에 사고는 실종되었고,
연결의 시대에 고립은 심화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나와 다른 너”를 단죄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지성인인 당신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자극보다 사유를 선택하라.”
“소속보다 윤리를 선택하라.”
“몰입보다 성찰을 선택하라.”
우리는 기계가 될 수도 있고,
기계를 조종하는 권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은 선택은—
그 어떤 것도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말의 윤리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기계가 되기를 거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