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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궤적-연예계에 뛰어들다(2)

by LISA Apr 01. 2025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긴 것은 공무원을 하다가 기자가 됐을 때만큼이나, 이직한 정도의 쇼크였다. 전날 저녁까지 야당의 내분이 어쨌네 기사를 쓰다가 갑자기 다음 날 연예대상을 받은 방송인을 일대일로 인터뷰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속으로 '정치인과 연예인은 둘 다 '관종'이니 생리가 나름 비슷하지 않겠나' 생각하며 야심차게 질문지를 준비해갔는데, 연예인은 예상보다도 훨씬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오후에는 한 코미디언의 라운드 인터뷰에 갔는데, 이건 팬미팅인지 인터뷰인지 알 수가 없었고 함께한 기자들도 관공서에서 만났던 출입기자들과는 많이 달랐다. 거의 1시간을 떠들면서 받아치기를 했는데 너무 남은 내용이 없어 대체 뭘로 기사를 써야할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이 곳은 딱히 출입처라는 것도, 언론 응대 시스템도 없어 각개전투로 바닥부터 파야 했다. 다른 출입처는 그래도 2년 정도면 웬만큼 장악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는 한 10년은 해야 '엣헴' 소리를 해볼 수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부서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고, 그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업계에서 읽히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한명한명 만났고 한땀한땀 콘텐츠를 뜯어봤다. 보지 않고도 잘 쓸 수 있으면 베스트겠지만, 그 전까지 TV와 거리가 멀었던 내게 열심히 보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4년 가량을 하다 보니 내 콘텐츠 리뷰와 시장 분석을 인정해주는 업계 관계자들이 생겨났고, 먼저 찾아오는 취재원들도 있었다. TV에서만 보던 중견배우들의 집에 초대 받아 가보기도 하고, 업계에서 방귀 꽤나 뀐다는 매니지먼트 대표들과 만나 (우리 회사의) 기사로는 못 쓸 뒷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지금은 세상에 없는 배우 김수미 선생님이다.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많이 힘들었는지 회사 유선전화로 연락와서 대중문화 담당 기자를 찾는다며 연결된 게 시작이었다. 당시 그는 "은퇴한다고 빨리 기사 써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데, 그를 잘 몰랐을 때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진심은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알겠으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하고 끊은 뒤 회사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다른 연예 매체 같으면 냉큼 썼겠지. 사실 지금도 연예 매체들의 생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데스킹 과정 자체가 없는 매체도 많고, 온갖 자극적인 미다시를 뽑는 곳은 널렸다. 누가 봐도 아닌 것 같은 이야기도 일단 지르고 보고,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든 '아니면 말고' 식인 곳도 많다. 인터뷰 때는 나 혼자 질문한다고 떠들어주는 동안 자기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기사를 후다닥 써서 내보내고 가장 빨랐다며 뿌듯해하는 경우도 종종 봤다.


어쨌든 첫 전화를 계기로 나는 고인과 친해졌다. 고인은 드센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여린 사람이었고 마치 친정엄마 같은 느낌도 있었다. 집에 가면 늘 손수 국수를 말아주거나 즉석에서 뚝딱 대파김치 같은 것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한사코 안받는다 해도 안 받으면 재활용 쓰레기장에 가게 될거라며 입지 않는 옷이나 가방을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뭔가 선물을 사가면 그렇게 뭐라고 구박했고, 유일하게 좋아했던 것은 꽃다발이었다. 물론 고인과 친해진 대가는 제법 컸다. 사후 발간된 책을 통해 알게 된 부분이 많지만, 여러가지로 힘들었던 그는 새벽이든 밤이든 종종 취한 채로 전화를 하곤 했다. 레퍼토리는 하소연으로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몇 번 반복되니 참 힘들기도 했는데, 그러다 또 한동안 전화가 없으면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아들이 결혼하고 손녀가 태어나면서 꽤 심신이 안정되는 듯 했는데, 역시 기자와 취재원 사이에서 알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나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연락을 못했을 때 그가 갑자기 떠났다. 꽤 큰 취재원과의 두 번째 이별이었다. 유족이나 회사 관계자들과도 워낙 잘 알았던 덕분에 기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빈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꼭 취재 목적은 아니었으나 자정 넘어까지 앉아있었더니 아들과 며느리가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조문 온 연예인들, 그리고 업계 관계자들은 모두 고인으로부터 반찬 한 번 안 받아본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 진심으로 안타까워 했고 슬퍼하는 걸 보면서 고인은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라 몸이 꽤 힘들었을 때지만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가기를 참 잘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밖에도 방송가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미투 사태 때 세상을 등진 한 배우의 초라했던 빈소부터 첫 싱가포르 출장 때 '분명히 키워서 매각한다'에 걸었던 넷플릭스의 급격한 성장과 K콘텐츠의 돌풍까지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많다. 방송가를 취재하다보니 연예계 외에 타 언론사들의 파업이나 우여곡절을 옆에서 지켜본 것도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원래 업계 사정은 서로 기사를 안 쓰는 게 불문율이었던 것 같은데, 시대가 변하면서 이것도 상당 부분 무너진 것 같다. 


김수미 선생님 외에도 일일이 이름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나이 차이를 넘어 진심으로 대해줬던 중견 배우들과, 놀랍게도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었던 원로 작가들, 그리고 업계 이야기보다 인생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눴던 매니지먼트 관계자들과는 지금도 종종 연락하곤 한다. 워낙 대인관계에 게으른 탓에 한 출입처를 떠나면 딱히 뒤돌아보지도 않고 취재원들과도 멀어지는 편인데, 유독 문화부에서 만났던 몇몇과는 인연이 오래 지속하는 것 같다. 이곳도 바닥부터 시작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기가 막힌 일도 많고 사기꾼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감동적인 순간도 많고 정 많은 사람도 제법 있다. 물론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산다는 측면에서 정치권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콘텐츠, 즉 스토리를 다루는 사람들인 만큼 정서적 소통에 목 마를 일이 없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 부서를 옮겨 바쁜 와중에도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심사가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고 열심히 참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처음 이 부서에 왔을 때는 콘텐츠를 보는 행위에 대해 그저 킬링타임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 콘텐츠와 창작자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극에서 인생을 참 많이 배운다. 흔히 쉽게 보는 지상파 주말극에는 우리 일상이 있고, 로맨스극에는 대리만족이 있으며, 장르극에는 무한한 상상력과 지성이 녹아들어 있다. 여러 작품을 보고 있자면 때로는 눈물이 핑 돌기도,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일로 콘텐츠를 본다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지만, 내가 어떤 부서에 있더라도 완전히 놓고 싶지는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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