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교육'의 연장선으로 시작한 공부방.
아들의 학원 스케줄에 맞춰 수업은 최소한으로 잡고, 홍보조차 딱히 하지 않았던 작은 공부방이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꾸준히 운영되었다. 애초에 집에서 공부방을 연 이유도, 초등 수업만 고집했던 이유도 전부 아들 때문이었다. 내 아이의 보폭에 맞춰 시작한 일이었기에 커리어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이제 곧 중학생이 된다.
아이의 독립적인 성장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이제 ‘엄마’로서의 비중보다 ‘강사’로서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본격적인 도약을 위해 중등 필수 한국 단편 소설들을 샅샅이 분석하고, 세계사 지식도 밤낮으로 채워 넣었다. 집 주변 아파트 단지와 상가 정보까지 꼼꼼히 훑으며,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명의 학생을 거느리고 활기차게 교실을 누비는 유능한 ‘원장님’이 된 나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새로운 간판과 인테리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공간.
그것이 나의 정해진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아들의 6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학부모가 가장 긴장하고 불안해한다는 이른바 ‘마지막 골든타임’.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중학교 가기 전에 수학 한 바퀴는 더 돌려야 한다’느니 ‘영문법을 끝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사실 나는 아이에게 무리한 선행을 권하지 않는 쪽이었다. 그저 학교 진도에 맞춰 해당 학기의 심화 문제 몇 개를 차분히 풀리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막상 닥쳐온 현실은 냉혹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주변 학원들을 알아보니, 이미 대다수의 아이는 중학교 1, 2학년 과정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들어갈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수학 학원 원장은 내게 “지금은 반이 없고, 내년 3월 중학교 시작할 때 신규반을 개설할 테니 그때 다시 오라”는 말뿐이었다.
당장 눈앞의 방학에 보낼 학원조차 마땅치 않은 상황.
소신 있게 지켜온 교육 방식이 현실의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와 함께 방학을 보낼 학원 스케줄이 통째로 사라지자, 역설적으로 나의 시선은 담장 너머 해외로 향하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면 긴 시간을 내기 어려울텐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멀리 떠나보자.’
포털 사이트에는 ‘해외 캠프’ 검색어를 넣었다.
그러자 정말 다양한 나라의 영어 캠프 정보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캐나다, 호주 같은 영미권부터 하와이, 괌, 그리고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까지 지역도 광범위했다. 캠프의 종류 또한 학원 캠프니 국제학교 캠프니 스쿨링이니 하는 생소한 개념들로 가득했다. 정보를 취합하고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우리가 결정한 곳은 말레이시아의 국제학교 캠프였다.
공부방 방학을 마냥 길게 뺄 수 없어 일정이 2주 정도로 짧았기에, 가까운 동남아 중에서도 치안이 좋고 인프라가 훌륭한 ‘조호르바루’를 낙점했다. 영어를 단숨에 마스터하겠다는 거창한 목적보다는, 낯선 환경에서 국적이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 부딪히고 소통해 보는 경험, 그거면 충분했다.
그곳에서 생활은 황홀했다.
아침을 챙겨 먹여 아이를 노란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나면, 나는 도보 2분 거리의 스타벅스로 향한다. 갓 구운 샌드위치와 따뜻한 라떼 한 잔을 곁들여 책을 읽고 글을 쓰다 숙소로 돌아오면, 방은 이미 호텔 서비스로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하버를 산책하고 이름 모를 열대 과일을 구경하며 저녁거리를 장 봐서 돌아오면,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오후 간식까지 살뜰히 먹여 다시 호텔 로비로 데려다 준다. 아이는 객실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호텔 수영장으로 곧장 뛰어든다.
탁트인 하버 전망의 수영장에 모인 아이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허물없이 깔깔거리며 물놀이를 즐겼다. 그 모습을 옆에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걱정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신나게 에너지를 쏟고 돌아오니 저녁밥이 맛없을 리 없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수학 문제 몇 개를 푼 뒤 곯아떨어지는 평화로운 일상. 한국에서 입에 달고 살던 “게임 좀 그만해”, “핸드폰 좀 내려놓아라” 같은 잔소리는 이곳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캠프에서 아이는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교과서 밖의 생생한 ‘범아시아적’ 경험을 몸소 쌓아갔다.
‘이거지, 이게 진짜 산 교육이지!’
이 강렬한 깨달음은 우리 가족을 흔들었다.
평소 국제학교 교육에 긍정적이었던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더해지자 모든 결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캠프 시작 단 3일 만에 나의 검색창은 ‘캠프 정보’에서 ‘조기 유학’과 ‘국제학교 입학’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입학 가능한 영어 수준부터 비자 조건, 학비 및 현지 생활비까지 밤낮없이 정보를 수집하며 한국에 있는 유학원들과 상담 약속을 잡았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발걸음을 서둘렀다.
처음 방문한 유학원은 “영어 실력이 전혀 없어도 입학할 수 있는 학교도 있다”며 무조건적인 낙관론만을 펼쳤다. 하지만 내가 미리 분석하고 점 찍어둔 학교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오직 자신들과 제휴된 학교들만 추천하는 모습에 깊은 의구심이 들었다.
또 다른 유학원을 찾아 연락했다.
그곳에서 아이의 실제 영어 능력과 내가 원하는 교육 철학과 예산, 미리 골라둔 학교들을 공유했다. 그제야 내 아이에게 꼭 맞는 맞춤형 로드맵과 신뢰할 수 있는 학교 리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믿음직한 파트너를 만난 덕분에 현지 학교 답사 서비스까지 막힘없이 예약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지난 4년간 일궈온 나의 작은 터전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답사를 떠나기 전,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공부방 폐업 소식을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전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학부모님들은 너무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일처럼 따뜻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아이가 독서를 좋아하게 됐어요.”라는 메시지들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무엇보다 마음을 세게 흔든 건 아이들이었다.
마지막 수업 날,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기념사진을 찍자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평소 무뚝뚝하던 아이들도 작은 손으로 내 허리를 꼭 안아주며 전하는 아쉬운 작별 인사들.
“선생님, 보고 싶을 거예요.”
“가서도 꼭 연락하세요.”
아이들의 진심 어린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준 것보다 받은 사랑이 더 컸음을 깨닫는 안도감, 그리고 고마움. 아쉬움과 뿌듯함이 교차하는 감정을 꾹 눌러 담으며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았다.
그렇게 학원 원장이 되려던 나의 정교한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계획에서 벗어난 이 선택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리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아이의 손을 잡고,
더 넓고 낯선 세상을 향해
가장 용기 있는 첫 발을 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