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위의 24시간 무교대 근무, 워킹맘

by 나름

20대의 뜨거웠던 여행.

그 길 위에서 얻었던 궤도 밖의 설렘은,

치열한 회사 생활의 소음 속에 점점 희미해져 갔다.


30대의 시작은 결혼과 출산이라는

거대한 새로움으로 꽉 차 있었다.

업무 중 짬을 내어 하듯 정신없이 결혼했고,

달콤하리라 기대했던 신혼은

서로 출퇴근 시간이 달라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둘이 버는데 쓸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추억 대신 돈이 통장 위에서 차곡차곡 쌓였다.


놀라움으로 맞이한 새 생명

태교는 야근으로 대신했고,

임산부 요가 대신 회의실을 오갔다.

결국 만삭까지 이어진 회사 생활.

출산휴가 시작과 동시에 아이가 세상에 나왔고,

나는 ‘엄마’라는 묵직한 명함을 받았다.


아이에게서 사람 테가 나나 싶을 무렵

출산 휴가가 끝나버렸다.

밤에는 수유하고 낮에는 출근하는,

사실상 24시간 무교대 근무의 시작이었다.

새벽,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어지고,

겨우 잠든 아이를 등 뒤에 두고

눈을 비비며 출근 준비를 했다.

잠을 못자니 사는게 사는게 아니다.


당시에는 유명무실했던 육아휴직 제도.

나는 "짜르려면 짤라라" 싶은 비장한 심정으로

당당히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다시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었다.


밤마다 아이를 재우며 가만히 손을 쥐어주던 시간,

첫 걸음을 떼던 순간의 떨림,

작은 목소리로 나를 찾던 아기의 울음소리는

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선물했다.

동시에 엄마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핏줄 너머의 지독한 헌신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어느덧 소중했던 육아휴직이 종료되었다.

매일 울기를 반복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매달리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낸 뒤 출근길에 올랐다.

발걸음마다 미안함이 묵직하게 얹힌다.

그렇게 출근해서 일하다 보면 돈 버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은 전염병 핫플레이스였다.

폐렴, 장염, 수족구, 그 외 이름 모를 바이러스까지.

아이가 병원에 입원할 때면

밤새 보채는 아이를 겨우 달래 눕히고

나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차 안에서 연신 메일 수신 알람이 울리고,

회의 자료와 업무 요청 메일에 눈앞이 아득했다.

자리에 앉아 화면 속 자료를 들여다보면서도,

밤 사이 울었던 아이의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가슴 한켠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직장에서 ‘애엄마’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피눈물 나던 노력과 몸부림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사회적 인정, 후배들의 선망,

그리고 내 이름 석 자가 찍힌 명함이었다.

그것들이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끈이라 믿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치열한 생활이 결국 내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인생을 살면서 한 가지 일만 해보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렇게 15년간 이어온 디자이너 생활을 청산했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살폈다.

독서 모임에 반해 독서지도사 공부를 시작했고,

평소 관심 있던 인테리어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실내건축기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터득한 부동산 지식을 살려 중개사 공부도 해보고,

아이와 함께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동 미술과 아동 심리학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할 수 있는 공부를 실컷하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독서토론 모임에서 만난 분의

한 마디가 나를 각성하게 했다.

50을 바라보던 그분은,

아이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둔 것을

인생에서 가장 후회한다고 했다.


아! 이러다 나도 후회하겠구나.

일단 다시 일을 해보자.

일하면서 제2의 직업을 준비해도 늦지 않다.


예전에는 잘나가는 회사, 인정받는 직급,

그에 걸맞은 연봉이 기준이었다면,

이번에는 내 개인 생활과 일의 병행이 우선순위였다.

기준에 맞는 회사 리스트를 추리고,

취준생처럼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출판사 디자이너의 명함을 다시 갖게 되었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거대한 정착지 위에서,

나의 진짜 여행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