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발을 내딛다
이사 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집안이 어느 정도 정돈되었다. 바닥은 닦였고, 짐들은 제자리를 찾았다. 비록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툇마루가 전부인 작은 집이었지만 세탁소 셋방에 비하면 마음은 편했다. 아침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집은 조용해졌다. 그제야 여자는 비로소 현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닦고, 정리하고, 쓸어내며 하루를 채웠다. 이불 빨래를 사나흘 들이로 해댔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어진 집 안에서 여자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이 나던 날의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뿌연 연기, 타는 냄새, 바닥에 주저앉았던 순간.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 느꼈던 감각만은 또렷했다. 숨이 막히던 공기와 다리에 힘이 풀리던 느낌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두려움은 여자를 종종 멍하게 만들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있다가도 갑자기 가슴이 꽉 막히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감각만이 점점 커졌다. 그 옛날 남편이 대학공부를 할 때나
제주에서 군복무를 하느라 떨어져 지내던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함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다섯아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당장의 오늘이 막막했다.
비어버린 쌀독과 아이들 학교에 내야 할 기성회비등. 내가 움직여 무어라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자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루 이틀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여자의 머릿속의 생각도 서서히 줄어들 즈음,
여자는 문득 한가지 생각만 붙잡고 있었다.
내가 사라지면 어떨까.
내가 떠나버리면,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거두지 않을까. 아이들은 아버지와 살게 되고, 최소한 굶지는 않을 것이다. 여자는 그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생각은 비겁하다기보다 현실적인 계산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여자는 조용히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 옷을 깨끗이 세탁했다. 낡은 옷은 꿰매고, 이불을 빨아 햇볕에 널었다.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며칠은 먹을 수 있도록 국도 끓였다. 아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평소처럼 행동했다.
떠날 날을 마음속으로 정해두었다.
말하지 않았고, 적어두지도 않았다.
그저 ‘그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날이 오면, 조용히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그날이 바로 다음 날 아침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날 밤, 여자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몸이 이상하게 뜨거웠다. 이마에 열이 올랐고, 온몸이 쑤셨다. 이불을 덮어도, 벗어도 열은 가시지 않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여자는 밤새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켰다. 물을 마시고, 다시 눕고, 또 일어났다. 머릿속은 흐릿했고,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침이 가까워질수록 몸은 더 아파왔다.
결국 여자는 그날 아침, 일어나지 못했다.
며칠 뒤 몸이 나아지자, 여자는 다시 같은 생각을 했다. 다시 준비를 하고, 다시 그날을 정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열이 나고, 기운이 빠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몇 번을 그렇게 겪고 나자, 여자는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막고 있는 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한 어떤 힘이 나를 꼼짝 못하도록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한두 번도 아니고 왜 이런 일이 자꾸 생긴단 말인가. 그 생각이 들자, 여자는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자신이 붙잡혀 있다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에 사는 애 엄마와 마주쳤다. 아이들 이야기, 날씨 이야기 같은 시시한 말을 나누다가, 그 애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주머니, 교회... 한번 나가보시면 어떨까요?”
그 말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여자는 잠시 멍해졌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다만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아주머니, 교회... 한번 나가보시면 어떨까요?
아주머니, 교회 한번...
교회 한번...
밤새도록 그 한 마디가 여자의 귓가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한 잠을 자지 못하고 어지러운 몸으로, 날이 밝자마자 여자는 애기 엄마를 찾아갔다.
"애기 엄마, 나 밤새 한 잠도 못 잤어요.
그 교회, 나 좀 데려가요."
그 주, 여자는 그 애 엄마와 함께 동네 교회로 향했다.
교회 문 앞에 섰을 때, 여자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 안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낯선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길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여자는 아직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혼자 버티는 것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