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
나는 언젠가부터 ‘최선’보다는 ‘차선’의 삶을 선택해 왔다. 하고 싶었던 일은 많았지만, 마음속엔 늘 조심스러움이 붙어 다녔다.
그래서 간절했던 것들을 뒤로하고, 그나마 실패해도 덜 아플 것 같은 길을 골랐다. 그게 옳은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말이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 나를 어느 정도 보호해 주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속이 자꾸만 비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뭐였지?’
질문이 떠오를 때면, 나는 어느새 가장 솔직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어릴 때 나는 좀 관종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해내고, 박수받는 그 순간이 짜릿했고, 내 감정이나 표현이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게 너무 좋았다.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할 때, 나 혼자 신난 줄 알았는데 관객들의 눈빛과 표정을 보면서 우리는 같은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게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웃고, 울고, 같이 신나 해 주는 그 순간을 느끼며, 감정이 오가는 찰나에 우리는 말없이 연결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이런 게 내가 하고 싶은 거였나?’
‘유명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과 이걸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누군가가 조금만 눈에 띄어도 금세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관심을 받을수록 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냥저냥 조용히 사회에 섞여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같은 ‘튀는’ 사람은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조차, 이곳에선 조금 지나치고 피곤한 태도로 보였다.
그저, 무언가의 압박 속에서 서서히 알게 됐다.
‘이런 성격으로는, 사회에서 오래 버티긴 힘들겠구나.’
어린 시절 함께 감정을 나누던 사람들도 진심을 나누기보단 뒷말을 주고받는 쪽에 더 익숙해졌고 예전의 그 따뜻함은 사라진 것만 같았다.
나는 튀기보단 적당히 장단 맞추는 쪽으로 성향이 바뀌었고 그걸 어른스러워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삶은 그렇게까지 뜨겁지 않아도 괜찮은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나는 적당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좋아하던 것들은 점점 시들해지고 하고 싶던 일들조차 하나둘씩 ‘의무’처럼 느껴졌다. 어떤 날은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무표정한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나에게 ‘최선’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분명 내가 만든 인생이 맞는데, 왜 이토록 낯설게 느껴질까?
너무 오래, 너무 많이 포기하다 보니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그저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다.
그렇게 나는 차선의 길을 걷고 있다.
차선이라는 건 단지 첫 번째가 아니었을 뿐,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이고, 최선은 아니지만 분명 마음 한편에서 원했던 일이기에 그 선택도 내 진심에서 비롯된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시킨다.
이 선택이 비록 내가 처음 그리던 그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원했던 방향이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요즘의 나는, 다시 뭔가를 뜨겁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게 무대든, 글이든, 아니면 아주 작은 무언가든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닐지라도
내 안에서 진심이 움직이는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아직 용기가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차선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