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국은 왜 가을마다 이 맛에 집착할까?

맛보다 먼저 오는 감정—PSL이라는 기억

by 한이람
‘미국맛’은
특정 문화를 정의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비미국인 디자이너가 관찰한,
낯설고도 익숙했던 감각의 기록입니다.



PSL is BACK!!!


PSL! 미국 가을의 감정 알림


가을이 오면 제일 먼저 이 알림을 받는다.

스타벅스가 PSL을 꺼내는 순간,

가을이라는 계절은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PSL(Pumpkin Spice Latte).

계절의 신호탄처럼 작동하는 맛.


거리 위 낙엽보다, 옷장의 가디건보다,

가을은 컵 안에 먼저 들어온다.



호박이 지배한 계절


미국의 가을은 이렇게 시작된다—

호박으로!


마트 진열대엔 호박 파이, 호박 스프레드, 호박 쿠키가 쌓이고, 냉동 코너에는 호박 치즈, 호박 수프, 호박 뇨끼까지. 달달한 냄새를 뿜는 호박향 캔들, 차량용 호박향 디퓨저, 반려견용 호박 간식. 미국의 가을은 그야말로 호박의 왕국, 아니, ‘펌킨스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호박맛,

정작 호박맛이 아니라고?


미국의 호박맛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호박, 늙은 호박, 애호박의 구수한 맛과는 좀 다른 맛이다. 계피, 넛맥, 정향, 생강 같은 향신료의 따뜻한 콜라주. 펌킨이라는 이름의 향수, 혹은 먹는 향초에 가깝다. 호박이 아니라, 그걸 먹던 순간의 냄새다.


그 기억은 매년 가을, 맛보다 먼저 도착한다.



호박이 미국의 가을이 되기까지

살기 위해 먹던 호박은 어느새 가을을 기억하게 하는 감정이 되었다.


미국에서 호박은 처음부터 감정적인 음식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살려고 먹었다. 17세기, 유럽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신대륙의 겨울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존 프레시 대신, 미국 원주민들이 알려준 작물들 덕분이었다. 그중 하나가 호박이었다. 이어 호박은 추수감사절로 이어지고, 호박 파이는 그 정서의 상징이 된다. “가을엔 호박 파이지”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비 오면 파전이지”만큼이나 자연스러워졌다.


1930~40년대, 대공황을 겪으며 미국 정부는 “우리 식량은 우리가 책임지자” 모드에 돌입한다. 그때 선택된 작물은 잘 자라고, 잘 저장되고, 통조림화가 쉬운 호박. 정부는 호박을 밀었고, 호박은 캔 속에 정착했다. 지금도 미국에서 통조림 호박의 80%를 차지하는 브랜드, 리비스(Libby’s Pumpkin)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1960~70년대엔 냉장고와 오븐이 보급되고, 가정용 베이킹 시대가 도래한다. 브랜드들이 호박 파이 믹스를 팔기 시작했고, 레시피는 제품 뒷면에, 감정은 광고 속 엄마의 미소에 적혀 있었다. 그렇게 호박은 미국에서 엄마의 맛이 되었고, 이후 스타벅스가 그걸 라떼로 만든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졌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호박은 단지 오래된 전통이 아니라,
정부가 밀어주고, 브랜드가 감정을 얹은
국가적 추억이라는 것.


밭에서 스타벅스까지—펌킨의 성공 서사 Ⓒ Starbucks


그리고 그걸 지금 펌킨 스파이스 라떼(PSL)라는 이름의 정서로 마시게 된 것이다.



Branded Nation

그냥 호박맛? 노노. 가을을 설계한 맛이다. Ⓒ Cardinaltimes


미국은 종종, 아니 꽤 자주 감정을 브랜드로 설계한다. PSL이 그렇고, 시나몬롤이 그렇고, 마시멜로가, PB&J가 그렇다. 다정한 기억이 담긴 것처럼 보이지만, 다정해 보이도록 기획된 맛들이다.


스타벅스의 PSL은 그걸 극적으로 보여준다. 출시 초기엔 실제 호박은 없었고, 계피, 넛맥, 정향 등으로 호박맛의 기억을 재현했다. 그 향신료의 콜라주만으로도 사람들은 가을을 떠올렸다. 출시한 지 10년 이상 지나고서야 스타벅스는 호박 퓌레를 첨가했다. 감정을 먼저 만든 뒤, 맛은 그 감정을 따라오게 했다. 이런 감정의 선취(先取) 전략이 가능했던 건, 미국이 ‘공감할 추억’보다 ‘공유할 감정’이 더 절실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감정의 공통분모가 약한 나라다.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땅.

고향도, 언어도, 추억도 각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익숙해 보이는 감정을 만드는 일은 이곳에서 가장 보편적인 설득 기술이 된다. 자본주의는 그걸 향과 색, 맛으로 포장한다. 감정의 브랜디드 네이션(Branded Nation).


PSL을 마신다는 건, 가을을 느끼라고 설계된 감정을 삼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조금 시시하지만 따뜻하고, 조금 뻔하지만 위로받는 그 감정. 그 감정을 계절로 포장하고, 한정판 스티커만 붙이면 끝. 그런 거야 미국이 누구보다 잘하니까.



맛은 기억의 언어다

감정은 캔 속에 보존된다. 그걸 꺼내는 계절이 있을 뿐.


미국이 감정을 설계하는 나라라면 한국은 감정을 불러내는 나라다. 그들은 계절이 오기 전에 “이번 가을엔 이런 감정을 느껴보세요!” 제안하고, 우리는 계절이 스스로 감정을 데려오길 기다린다.


계란프라이, 김치찌개, 짜장면, 떡볶이.


단순한 음식이라기엔 부족한, 추억이자 기억. 우리는 김치찌개의 향에서 가족을 떠올리고, 그들은 계피향 속에서 ‘함께한 순간이 떠오르도록 설계된 감정’을 느낀다. 미국은 누구에게나 익숙할 법한 풍경을 맛으로 만들고, 한국은 공통의 맛에서 나에게 익숙한 장면을 간직한다.


하지만 결국, 감정은 언제나 맛을 타고 돌아온다.






맛은 그냥 입으로 삼키는 게 아니다.

어떤 순간을 밀봉한 감각이다.


향 하나에 계절이 돌아오고,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묻힌 줄 알았던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


미국은 감정을 설계했고, 우린 불러낸다.

그 방식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뜨거운 김치찌개 한 숟갈,

달콤한 펌킨라떼 한 모금.


모두, 마음속 어딘가에 저장된 추억의 문장이다.



이번 가을은 사이렌오더로 도착! Ⓒ Starbucks



톡— 리비스 통조림 캔을 따는 순간,

계절 전체가 따라 나온다.


이 한 잔엔 가을보다 먼저 도착한 감정이 있다.


맛보다 먼저 온 추억.

그게 PSL의 정체다.





이 글은 미국맛 시즌2의 마지막 이야기예요.
프롤로그부터 읽고 싶다면 [여기]로.
시즌1의 모든 맛은 [여기]에 있어요.


미국맛 시즌2를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가을은 어떤 맛인가요?
PSL은 마셨으니, 겨울엔 핫초코로 만나요 ☕


※ 참고한 자료 및 사진 출처

[Delish] Is There Actually Pumpkin In Starbucks' Pumpkin Spice Latte?

[Global Produce Sales] The History of Pumpkins

keyword
이전 21화이 아이스크림은 흑인을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