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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스크림은 흑인을 지지합니다

우리가 삼키는 신념의 맛

by 한이람
‘미국맛’은
특정 문화를 정의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비미국인 디자이너가 관찰한,
낯설고도 익숙했던 감각의 기록입니다.



2019년, 벤앤제리스는 Justice ReMix’d라는 아이스크림을 출시했다.



불평등에 맞선 맛. 그리고 그 옆 슬로건.

"We must dismantle white supremacy."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를 해체해야 한다.


어떤 아이스크림은 정치적이다.

어떤 아이스크림은, 그냥 달콤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까?

정의일까, 달콤함일까.

혹은 그 둘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믿고 있을까.



우리가 삼키는 신념의 맛

“Black lives matter.” 도발적이라면, 그건 현실 때문이다.


Ben & Jerry's believes Black lives matter.
벤앤제리스는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믿는다.


나는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의 맛보다 이 문장을 먼저 접했다. 이 브랜드는 맛이 아니라 입장으로 등장한다. 그들의 슬로건, 광고 문구, 메뉴 이름까지 하나의 선언문이다.


2019년에 출시된 메뉴, Justice ReMix’d. 흑인에 대한 형사법의 불평등을 주제로 한 이 메뉴는, 초콜릿 시나몬 번과 브라우니가 섞인 맛. 말 그대로 정의를 리믹스한 아이스크림이다.


버니의 열망이 깃든 맛. 이 아이스크림엔 정치가 녹아 있다.


Bernie’s Yearning(버니의 열망). 진보 정치인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며 출시한 한정 메뉴다. 윗부분의 두꺼운 초콜릿 층은 상위 1%, 아래의 민트 아이스크림은 하위 99%를 상징한다. 먹는 방법도 안내되어 있다.


“초콜릿을 깨뜨려, 아래와 섞어 드세요.”


벤앤제리스는 투표를 독려하고, 트럼프를 비판하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입장을 내고, 이스라엘에 매장을 닫는다. 벤앤제리스는 정치적이다. 그 정치성을 맛으로 표현한다.


미국은 입장과 취향이 공존하는 나라다.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정치가 담긴다. 벤앤제리스는 그런 미국의 상징 같은 브랜드다. 진보적 메시지를 광고하고, 맛에 사회운동을 입힌다. 여기선 정의도 소비할 수 있어야 팔린다. 미국에서는 신념이 감각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 감각은, 달콤하다.


묻게 된다.

브랜드가 정의를 맛으로 만들 때,

그것은 감각화된 윤리가 된다.

정의는 달콤한 맛으로 소비될 수 있을까?



감각의 윤리학

브라우니에 시나몬 번, 혀끝에 남는 정의치곤 너무 달콤할지도. © Ben & Jerry's


정의가 감각으로 재현되면, 소비자는 실천이 아니라 경험을 하게 된다. Justice ReMix’d를 먹는 순간, 우리는 분노와 평등을 혀끝에서 경험한다. 시나몬 안의 평등, 초콜릿 위의 항의. 모든 메시지는 혀끝에 맴돈다. 그런데, 맛은 오래 기억된다.


정의는 과연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을까? 우리는 옳은 메시지를 삼켰고, 그 삼킨 것을 좋았다고 말한다. 마케팅이 정의를 이슈화시킨다는 건, 정의를 리뉴얼 가능한 콘텐츠로 만드는 일이다. 그건 더 감각적이고, 더 트렌디하며, 더 “먹고 싶은” 형태로 포장된다.


우리가 먹은 건 초콜릿 아이스크림이지만,

기억 속엔 정의가 남는다.

…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침묵이라는 전략

편의점 VIP존 (입장은 월급날에 한함) © shopfood


모든 아이스크림이 목소리를 내진 않는다. 아니,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배스킨라빈스는 말 대신 계절 한정과 신상 맛, 귀여운 콜라보로 대화한다. 핑크빛 색깔은 가득하지만, 입장은 없다. 사회도, 정치도, 인권도 잠시 냉동실에 넣어둔 듯하다. 그들의 세계엔 하나의 알림만 존재한다: "오늘은 31데이!"


하겐다즈는 조금 다르다.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급스럽게 안 한다. 정치적 침묵? 뭐 그렇게까지? 그냥 입은 닫은 채 감각을 판다. 미국이 만든 유럽 감성, 의미는 없지만 멋져 보이는 이름. 여기에 태도는 들어있지 않다.


"느낌만 낼 것. 이것저것 묻지 마시오."

이게 고급이구나 싶은 이미지면 충분하다. 말 대신 질감, 입장 대신 포장. 이 포장된 ‘감각의 고요함’ 자체가 하나의 전략이다.


정치? 권리? 운동?

그런 건... 감미롭지 않으니까, 넣지 않았다.



Brand Activism™?


브랜드가 정의를 외치는 건 신념일까, 전략일까.


윤리를 말할수록 소비자는 반응한다. ‘옳은 것을 고르는 나’라는 생각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포장한다. 브랜드는 안다. 이제는 맛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정의는 리미티드로 등장한다. 사회적 메시지는 때론 착한 브랜드의 인증서다.


쇼화된 브랜드 액티비즘의 전형. (Composite. Pepsi Global, HanorahHardy/Twitter)


하지만 진심을 말한다고 해서 그게 늘 진심처럼 보이는 건 아니다.


펩시의 2017년 광고. 켄달 제너가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펩시 캔을 건넨다. 화해의 제스처, 평화의 상징. 그런 설정이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싸늘했다.

펩시 하나로 50년 흑인 투쟁을 끝낸다고? SNS에 비난이 쏟아졌고, 광고는 하루 만에 삭제됐다. 펩시는 사과문을 냈지만, 조롱의 대상이 됐다.


이 사건은 존중 없는 브랜드 액티비즘이 얼마나 쉽게 공감의 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타인의 서사를 갈취해 자기 서사의 무대장치로 삼는 순간, 공감은 연출이 된다. 신념은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의 문제다.


말보다 중요한 건 배려온도다.

아무리 진심이라도,

캔 뚜껑을 너무 요란하게 열면 다 튀겠지.



브랜드의 윤리, 자본의 통제

정의의 메시지도, 팔리는 한에서만 유지된다.


벤앤제리스는 “우리는 흑인의 생명을 지지한다”, “우리는 백인우월주의를 해체해야 한다”는 말을 아이스크림보다 먼저 꺼낸다. 실제로 그런 문장을 티셔츠에 인쇄해 나눠주기도 했다. 그들은 행동했고, 정치적이었고,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정의는 누구의 허락 아래에 있었을까?

2000년, 벤앤제리스는 유니레버에 인수된다.
조건은 하나.


사회적 미션과 윤리 경영은 그대로 유지될 것.


그런데 2023년, 유니레버는 벤앤제리스의 정치적 게시물을 막고 CEO를 해임했다. 벤앤제리스는 브랜드의 양심을 지키겠다며 소송을 걸었다.



입맛의 정의? 기억의 윤리?

기억 속 정의는 바닐라처럼 흐릿해지고, 딸기처럼 달콤해진다.


초콜릿에 정의를 얹고, 민트에 평등을 섞는 일.


우리는 이제 정의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정의가 우리의 입안을 지나간다. 그중 어떤 건 진심이었고, 어떤 건 승인된 마케팅이었으며, 어떤 건 그냥, 달콤하기만 했다.


이 아이스크림은 흑인을 지지합니다.

그 말은 진심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진심조차

허용된 틀 안에서 흐를 수 있는 시대인 걸,

우리 모두가 조금씩 알아간다.



이해하려다 지쳤다. 그냥 바닐라 한 스쿱이나 퍼먹으련다.



신념은 언제나 복잡하고, 정의는 때로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날은, 그냥 달콤함만 먹고 싶어진다.


그냥… 입장 없는 달콤함.

조건 없는 위로 같은 맛.

그게 그렇게 정의롭지는 않더라도.


달콤함이 잠시 세상을 멈춰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날도 있는 거니까.


정의는 잠시만 냉동실에 넣어둘까 싶다.


오늘은 그냥 다 모르겠고,

바닐라 한 스쿱부터 녹이고 싶으니까.


그러면 안 될까.





이 글은 미국맛 시즌2의 20번째 이야기예요.
프롤로그부터 읽고 싶다면 [여기]로.
시즌1의 모든 맛은 [여기]에 있어요.


이 시리즈는 관찰 중심의 콘텐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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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읽고 지나가주셔도 좋습니다.


※ 참고한 자료 및 사진 출처

[Forbes] Ben & Jerry’s Social Responsibility: ESG Without The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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