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넘었을 무렵,
나는 내 껍질을 조금씩 벗기고 있었다.
아직 안쪽은 어두웠지만,
겉은 사람 구실을 조금씩 해내던 시절.
그날도 그냥 그랬다.
친구가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같이 가자고 했고,
난 대수롭지 않게
커피숍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검은 목티에 카키색 자켓을 입은 남자.
처음 본 얼굴인데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아니, 어디선가
계속 날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학창 시절,
가위에 눌릴 때마다
언제나 내 머리맡에 앉아
말없이 날 보던
그 얼굴과… 너무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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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 사람이랑 엮이겠다.”
그 생각이 머리보다 먼저 들었다.
그 사람이 좋았다기보다는
그냥,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이상한 편안함이 있었다.
딱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 같아서...
나도 이상한 사람,
그도 특이한 사람,
근데 같이 있으면
우린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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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친구들은 물었다.
“쟤랑 왜 만나?”
가진 것도 없고,
직업도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그 사람을
왜 굳이…
근데 나도 잘 모르겠더라.
그냥,
그 사람을 보면
내가 보였어.
뭔가 끌린다기보다
돌아갈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한 느낌?
피난처가 아니라,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느낌.
그때의 감정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됐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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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로를 위하려는 세심함도 없었던 것 같다.
기념일도, 생일도 잘 챙기지 않았고,
현실적인 걱정은 쌓여갔지만
그런 건 대화의 주제가 아니었다.
우리 대화는 늘
현실을 벗어난 차원의 이야기들이었다.
전날 꾼 꿈 이야기,
그날 갑자기 느껴진 감각,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너무 신기하게도
우리는 같은 꿈을 여러 번 꾸기도 했고,
같은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내가 아닌,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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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연스럽게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누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니고,
거창한 계기도 없이
그냥…
같이 가던 길을 계속 걷자는 마음으로.
1999년 4월 18일.
그날 이후,
내 삶의 방향이
‘나를 위한’ 쪽에서
‘우리’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함께한다고
내가 갑자기 행복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내 안에 있던 어둠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 이전의
또 다른 나에 대한 연민…
처음으로 나를 보여줄 수 있었던 그 시간을
사랑했던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