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 유혹, 각성의 책임
오늘날 마취 없이 수술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마취제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를 떠올려보면, 그 끔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외과 수술은 종종 건물의 지하층이나 꼭대기 층에서 진행되곤 했습니다. 이는 수술 중 환자의 비명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근육질의 간호사가 환자를 억누르고 있었고, 훌륭한 외과의사의 조건은 수술을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중국의 고전 '삼국지'에는 관우가 독화살을 맞은 팔을 치료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의사 화타가 그의 팔을 절개하고, 근육을 가르고, 뼈를 긁어냈음에도 관우는 태연히 바둑을 두었다고 전해지지요. 물론 이는 소설적 과장이겠지만, 마취가 없던 시대의 수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에는 환자에게 알코올을 다량 마시게 하여 의식을 흐리게 하거나, 일시적으로 기절시키기 위해 목을 조르거나 머리를 강하게 타격한 후 수술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공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바로 마취제 덕분입니다.
‘마취’는 영어로 anesthesia라고 하며, 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접두사 'an-'은 '없다'는 뜻이고, esthesia는 '감각' 또는 '지각'을 의미합니다. 즉, 감각이 없는 상태, 곧 마취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마취의 개념은 근대 의학의 산물처럼 여겨지지만, 그 기원은 의외로 오래된 문헌에서 발견됩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슬람 황금기 시대의 대표적인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Ibn Sina, 980-1037)는 그의 저서 '의학의 정전' (아비센나, Avicennae, 라틴어식 표기)에서 마취의 초기 형태를 기술하였습니다. 이 책은 17세기까지도 유럽 의과대학의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의학의 정전'에는 ‘마취 스펀지’에 대한 기술이 등장합니다. 이는 특정 약초를 달여 만든 액체를 스펀지나 천에 적신 뒤, 환자의 코 밑에 대어 흡입시키는 방식으로 진정 효과를 유도하였습니다. 수술 전 이 과정을 통해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보다 안전한 시술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이븐 시나는 마취 효과를 지닌 약초들도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편(진통 효과), 맨드레이크(진정 작용), 벨라돈나(근육 이완 및 마비), 헨베인(수면 유도)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민간요법 수준을 넘어서, 당시 중세 이슬람 세계의 의학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실용적인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주목할 점은,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병원이 공공 기관으로 운영되었고, 의료 기록이 꼼꼼히 보존되었다는 점입니다.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 그리고 인권을 존중하는 의료적 접근이 이미 이 시기부터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라고 해서 무지하거나 잔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오늘날의 흡입 마취법과 유사한 원리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흡입 마취제는 19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획기적인 전환점은 영국의 젊은 화학도,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의 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데이비는 16세에 부친을 여의고, 약국의 조수로 일하며 화학 실험에 몰두하게 됩니다. 특히 다양한 기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800년, 아산화질소(N₂O)에 마취 효과가 있음을 밝혀냅니다. 이 기체를 흡입하면 기분이 고조되고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되며, 데이비는 이 신기한 가스에 "웃음가스(laughing gas)"'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하지만 이 웃음가스는 의학적 용도보다 오히려 파티나 오락의 도구로 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에는 웃음가스를 주입하는 풍선이 인기를 끌었으며, 풍자의 문구로 “잔소리 많은 아내에게 특효약”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현재도 일부 유럽과 동남아시아의 클럽에서는 ‘해피벌룬’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며 흡입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웃음가스는 엄연한 의약기체로, 오용 시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과량 흡입하면 환각 증세나 의식 상실, 심지어 호흡곤란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2017년에는 국내에서 관련 사고가 발생했고, 2021년에는 할리우드 배우 데미 무어가 웃음가스로 인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속인주의 원칙을 따르므로, 해외에서의 사용 또한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물질입니다.
웃음가스를 최초로 임상에 도입한 인물은 미국의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Horace Wells, 1815-1848)입니다. 1844년 어느 날, 웰스는 웃음가스 파티에 참석했다가 기묘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한 참석자가 다리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웃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웰스는 “이 기체를 치과 마취에 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마침 자신의 사랑니를 뽑아야 했던 그는 조수에게 아산화질소를 흡입시킨 후 발치를 부탁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핀으로 찌르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했다”라고 회고하며 이후 한 달 동안 네 차례의 치과 시술을 웃음가스로 마취한 채 성공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웰스는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서 공개 실험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납니다. 그는 엄살이 심한 환자를 선택한 탓에, 시연 중 환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관중들은 그를 돌팔이로 몰아세웠고, 웰스는 공개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어 결국 치과계를 떠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웰스는 웃음가스와 클로로포름을 활용한 마취 실험을 계속하였지만, 점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습니다. 1848년, 그는 거리에서 다툼을 벌이다가 황산을 투척하는 사건을 일으켜 감옥에 수감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고작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비록 생전에는 좌절과 조롱 속에 생을 마감했지만, 호레이스 웰스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그 업적을 인정받게 됩니다. 현재 미국 치과협회(American Dental Association)는 그를 “치과 마취의 창시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의 실험정신은 근대 마취학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웰스가 마취 실험을 감행했던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은 오늘날 하버드 의과대학의 교육병원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의료기관 중 하나입니다. 이 병원의 역사적 유산으로서, 하버드 캠퍼스에는 현재 웰스의 부조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가 남긴 도전과 실패, 그리고 개척의 흔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당시 단순한 오락용으로 소비되던 웃음가스(N₂O)를 최초로 의료용 마취제로 전환한 웰스는, 단언컨대 현대 마취의 문을 연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실험은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 정신은 수많은 생명을 고통에서 구하는 의학의 혁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웃음가스 파티와 더불어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또 하나의 기체가 유행합니다. 바로 에테르(Ether)입니다. 휘발성이 강한 이 기체는 흡입 시 알싸한 자극과 함께 일시적인 환각 상태를 유도하였고, 특히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에테르 유희(Ether Frolics)’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실험적이고 자극적인 이 유희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마취 기술의 역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크로포드 롱(Crawford Long, 1815-1878)이라는 미국 조지아주의 젊은 의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1842년, 학생 제임스 베너블(James Venable)의 목에 난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에테르를 흡입시킨 후 수술을 진행합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환자는 통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는 기록상 인류 최초의 에테르 마취 수술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롱은 당시에 이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공로는 훗날 뒤늦게 조명받게 됩니다.
공식적인 마취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는 윌리엄 모턴(William Morton, 1819-1868)이라는 미국의 치과의사입니다. 그는 1846년, 신문기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에테르 마취를 이용한 치과 시술을 성공적으로 시연합니다. 이는 대중과 의료계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마취가 본격적인 의학적 도구로 진입하는 계기가 됩니다.
같은 해, 모턴은 화학자 찰스 잭슨(Charles Jackson, 1805-1880)의 자문을 받아 보다 정교한 준비를 갖추고, 웰스가 실패했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서 다시 한번 공개 마취 수술을 감행합니다. 환자는 목에 종양이 있던 젊은 화가였고, 에테르를 흡입한 후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환자는 “목이 무언가에 긁히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환자는 이후 10년을 더 살다가 결핵으로 생을 마감합니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은 한 점의 그림으로 남아 지금도 병원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마취 수술 장면’을 담은 이 유화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자랑이자 마취 의학의 상징으로 손꼽힙니다. 오른쪽 그림 속 모턴은 에테르를 투여하는 장면에서 독특한 장비를 들고 있습니다. 이 장비의 이름은 ‘레세온(Letheon)’으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망각의 강인 '레테(Lethe)'에서 영감을 얻은 명칭입니다.
모턴은 에테르 자체에 대한 특허를 낼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대신 이 장비에 특허를 신청하였습니다. 그는 에테르를 장치 내부에 넣어 상표화와 상업화를 동시에 노렸던 것입니다. 이는 마취 기술이 단순한 의학적 발견을 넘어, 산업적 가치를 지닌 혁신으로 전환되던 시점이기도 합니다.
전신마취제는 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입니다. 단지 수술의 성공률을 높였을 뿐 아니라, 환자의 인권과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향상한 혁신이었습니다. 그 가치를 인정한 미국 정부는 마취제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에게 10만 달러의 상금을 수여하겠다고 공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대체 누구를 ‘최초의 발견자’로 봐야 할까요?
1. 1842년, 조용히 실험실에서 에테르 마취 수술을 진행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은 크로포드 롱.
2. 1845년, 웃음가스를 이용한 공개 시연에 나섰지만 실패로 끝나버린 호레이스 웰스.
3. 1846년, 에테르를 이용한 공개 시술을 성공시키며 전 세계에 마취의 가능성을 입증한 윌리엄 모턴.
4. 성공한 공개시연에 자문을 제공한 화학자, 찰스 잭슨.
이 네 인물은 모두 일정 부분 기여를 했으며, 각기 다른 지지자들과 저널리스트, 정치인, 학자들이 각자 다른 인물을 옹호하며 논쟁은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하지만 끝내 누가 진정한 '마취의 아버지'인지에 대한 공식적인 결론은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중 모턴은 격렬한 논쟁과 비판 속에서 1868년 뇌출혈로 사망합니다. 그의 묘비에는 “흡입 마취의 발명자이자 계시자 (Inventor and Revealer of Anaesthetic Inhalation)”라는 문구가 새겨졌습니다. 이 문장을 본 잭슨은 격분하여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1880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네 명 중 유일하게 평온하게 생을 마감한 인물은 크로포드 롱이었습니다. 화려한 과학의 이면에는, 발명과 명예, 그리고 자아를 둘러싼 고통스러운 투쟁이 있었습니다.
에테르의 등장은 마취의 문을 열었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에테르는 인화성과 폭발성이 높고, 장기 노출 시 폐에 독성을 유발하며 기침, 구토 같은 기관지 자극 증상을 유발했습니다. 특히 산부인과 수술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민감하게 작용했습니다.
이 점에 주목한 인물이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영 심슨(James Young Simpson, 1811-1870)입니다. 그는 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마취제를 찾던 중, 1831년 이미 발견된 달콤한 향의 액체인 ‘클로로포름(Chloroform)’에 주목합니다. 심슨은 1847년, 자신의 거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직접 흡입 실험을 진행했고, 모두가 쾌적하고 깊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심슨은 산부인과 시술에 클로로포름을 적극 도입합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강하게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일부 성직자들과 보수적 사회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며, 마취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다.”
즉, 고통 없는 출산은 여성의 신성한 사명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던 것입니다. 마취된 여성은 ‘진정한 어머니의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모성애가 부족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클로로포름은 곧 널리 퍼지게 됩니다.
과학 기술이 사회적 반대에 부딪힐 때, 이를 잠재우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는 ‘광고’ 혹은 상징적인 인물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상징은 다름 아닌 당시 유럽 최고의 셀럽,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총 9명의 자녀를 출산했으며, 그중 8번째 레오폴드 왕자와 9번째 베아트리스 공주는 클로로포름 마취 상태에서 태어났습니다. 레오폴드는 혈우병 환자였고, 베아트리스는 그 유전자를 보유한 보인자로 알려져 있으며, 훗날 이들은 독일 왕실과 결혼하며 유럽 여러 귀족 가문에 유전병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대중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여왕이 클로로포름을 사용했다’는 소문 자체였습니다. 왕실의 선택은 곧 사회적 허용의 신호탄이었고, 여왕의 선택은 마취제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단숨에 잠재웠습니다. 작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아내 또한 열 번째 아이를 출산하며 클로로포름을 사용하게 되면서, 마취는 이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문명화된 분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클로로포름은 이어 미국 남북전쟁(1861–1865)에서 전쟁 부상자들의 외과 수술용 마취제로 널리 사용됩니다. 총성과 피가 난무하던 야전병원에서, 통증을 잊게 해주는 마취제는 군의관들에게 ‘신의 선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클로로포름의 치명적인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간과 신장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발암성 독성 물질일 뿐 아니라, 투여 용량을 정확히 조절하기 어려워 1,000명 중 14명꼴로 사망사례가 보고되었고, 미숙한 손에 들어가면 치명적 결과를 낳는 약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날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마취제입니다.
마취는 단순한 의학적 수단을 넘어, 문학의 서사 장치로도 활용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후반, 의과대학 출신 작가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은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약물과 마취의 상상력을 극대화합니다. 소설 속 홈즈는 마취제를 묻힌 헝겊을 이용해 지나가는 인물을 쓰러뜨리거나, 스스로 의식을 잃는 장면을 연출하곤 합니다. 물론 실제 클로로포름의 유도 시간(induction time)은 5~10분으로, 소설처럼 즉각적인 반응은 어렵지만, 도일은 당시 가장 빠른 작용을 보이던 클로로포름을 모델로 한 설정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를 잇는 20세기 초반의 추리소설 거장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약제 보조사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약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작품에 녹여냅니다. 다만 그녀가 선호한 것은 클로로포름이 아닌, 수면 유도제 계열인 바르비탈(barbiturate)로, 독살과 수면, 기억상실 등을 매혹적인 트릭의 소재로 활용합니다.
"바비츄레이트(Barbiturate)", 어딘지 귀엽고 다정하게 들리는 이 이름의 기원은 19세기 독일의 화학자 아돌프 폰 바이어(Adolf von Baeyer, 1849-1908)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는 1864년, 말론산(malonate)과 요소(urea)를 결합해 새로운 화합물인 바비츄레이트(barbiturate)를 합성해 냅니다. 훗날 그는 인디고 블루 색소를 발견한 공로로 190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며 그 업적을 인정받게 됩니다.
바비츄레이트라는 이름의 기원에는 여러 흥미로운 설이 얽혀 있습니다:
1. "Barbara"라는 친구 혹은 애인을 기념하기 위해
2. 그 화합물이 처음 합성된 날이 수호성인 성 바르바라(St. Barbara)의 날이어서
3. 요소 결정(urea crystal)이 가시처럼 보인다는 의미의 ‘barbed’에서 유래
4. 바이어가 자주 가던 펍의 종업원 Barbara의 소변(urea)으로 실험해서
진실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화합물은 이후 수면과 진정의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바이어는 분자를 만들어냈을 뿐이었고, 그 잠재력을 약물로 개발한 이들은 그의 뒤를 잇는 독일 화학자들이었습니다.
꼭 닮은 사진처럼 친구관계였던 독일 사람들은 barbital을 약물로 만들어낸 첫 연구자들입니다. 1903년, 이들은 바비츄레이트의 기본 구조에 에틸기(ethyl group)를 두 개 추가하면 수면 유도 특성이 강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화합물은 화학적으로는 디에틸바비츄레이트(diethyl-barbiturate)이며, 상품명은 "Veronal"이었습니다.
Veronal은 세계 최초의 상업적 수면제로, 환자들이 안정적으로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약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불면증 치료, 불안 완화, 심지어 수술 전 진정제로까지 활용되면서 바비츄레이트 계열의 약물은 급속히 의학계에 퍼져나갑니다.
바비츄레이트(barbiturates)의 발견 이후, 무려 2,500종 이상의 유도체가 연구되고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실용화된 2차 주자는 루미날(Luminal, 1912)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페노바비탈(Phenobarbital)입니다. 이 화합물은 페놀 고리(phenol ring)를 포함하고 있어 약물의 특성에 구조적 변화를 더합니다.
이어 등장한 메디날(Amobarbital, 1923)은 부틸기(butyl group)를 갖는 바비탈로, 지용성이 증가된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지용성(lipophilicity)의 증가는 약리학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유도합니다. 즉, 흡수 속도가 빨라지고, 작용 시간이 짧아지며, '리바운드 효과(rebound effect)'가 현저히 줄어듭니다. 리바운드는 바비탈류의 일반적 부작용으로, 약물이 사라진 후에도 뇌의 반동 작용으로 인해 몽롱함, 피로, 숙취와 유사한 상태가 지속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지용성이 높은 약물일수록 뇌 조직 내 지방층에 약물이 빠르게 재분포되기 때문에, 이런 잔존 농도에 따른 반동이 적어집니다. 이는 마취제나 수면제의 품질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였습니다.
바비츄레이트의 혁신은 미국의 제약회사 애보트(Abbott Laboratories)의 손에 의해 절정에 이릅니다. 이들은 바비탈 구조의 산소 원자를 황(Sulfur)으로 치환하여 티오펜탈(Thiopental)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약물을 개발합니다. 이는 정맥주사가 가능한 최초의 바비탈류 약물로, 극도로 높은 지용성 덕분에 빠르게 작용하며, 수술 전 마취 유도제(induction agent)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비츄레이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중독성, 과용, 그리고 자살 사고가 잇따라 보고되며, 이 계열의 약물은 점차 위험군으로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바비탈 중독은 수많은 유명인의 삶을 앗아갔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마를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입니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위 속에서는 47개의 페노바비탈 캡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약물로 인한 자살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며, 바비탈은 점차 의학계에서 퇴출당하게 됩니다.
오늘날 수면마취제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벤조다이아제핀(Benzodiazepines) 계열의 약물입니다. 이들은 비교적 안전성이 높고, 작용시간과 효과가 예측 가능하며, 중독 가능성이 낮아 바비탈을 대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면제 및 진정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벤조다이아제핀은 과연 완벽한 수면마취제일까요?
마취제는 인류에게 고통 없는 삶을 가능하게 한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수술의 공포를 덜어주고, 고통을 제어하며, 인간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한 약물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종종 유희와 쾌락에서 비롯되었고, 그 끝은 중독과 비극으로 마무리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약은 없습니다. 약이란 ‘효과’와 ‘부작용’을 함께 지닌 양면의 칼날입니다. 어떤 약이 ‘좋은 약’인지 ‘나쁜 약’인지는 그 사용자의 목적과 태도, 그리고 사회의 책임 있는 사용 문화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는 고통 없는 삶을 원하지만, 책임 없는 무의식은 더 큰 고통을 남깁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선례와 경고를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수천 년에 걸쳐 시도되고 실패하고, 때로는 목숨을 담보로 시험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과거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학의 연대기가 아니라, 인간이 무의식과 고통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 유산을 발판 삼아, 더욱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약물 사용의 시대를 열어야 할 때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